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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은 패배하지 않았다

SWEV 2016.08.21 08:30

단톡방의 누군가가 갑자기 엉뚱한 말을 꺼냈다. ARM이 인텔의 칩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ARM은 프로세서 아키텍쳐의 한 갈래일 뿐이니 ARM이 CPU를 생산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말이고, ARM 아키텍쳐를 만든 회사인 ARM 홀딩스는 애시당초에 공장이 없고 설계만을 담당하는 팹리스(Fabless) 기업이다. 공장 하나 없는 ARM 홀딩스가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생산 공장을 갖춘 인텔의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말이 안되는 이야기라 나는 다시 물었다. 인텔이 ARM 아키텍쳐의 CPU를 위탁생산 하는 것을 잘못 본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지인은 아래의 기사 내용이 담긴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기사 전문 링크 : 인텔 굴욕의 날. ARM 칩셋 위탁 생산 계약 체결[클릭]


일단은, 다른 회사의 제품을 생산하는 일이 도대체 왜 굴욕인지부터 묻고 싶다. 공장과 생산 설비를 가진 업체가 돈을 벌기 위해 남의 일을 해주는 것이 굴욕은 아니지 않은가. '갑'이 아니라 '을'이기 때문에 굴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제발 아니었으면 한다. 그만큼 천박한 생각이 글에 묻어있는 거라면 기사의 질 따위는 이미 전혀 문제가 아니게 된다. 자본과 노동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 전체가 완전히 틀렸다는 이야기니까.


△ 플레이스테이션 3의 CPU인 CELL. 재밌게도 IBM의 메인프레임용 CPU인 POWER 기반으로 설계되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물건을 많이 찍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회사가 생산력이 약한 회사의 물건을 대신 찍어내 주는 일은 전혀 굴욕이 아니다. IBM은 자사의 플래그쉽 CPU인 POWER 프로세서를 작게 줄여 CELL CPU를 찍어낸 뒤 소니에 팔았다. 삼성전자는 최근에 퀄컴의 CPU를 위탁생산 중이고 아예 TSMC나 글로벌 파운더리처럼 남의 물건만 찍어내는 것으로 돌아가는 회사들도 존재한다. 이런 업체들이 버젓이 있는 마당에 이게 굴욕이나 패배의 이유가 될 순 없다. 결정적으로, TSMC가 없었다면 저 기사가 옹호하는 ARM이 애초에 시장에 널리 퍼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삼성전자가 퀄컴의 CPU를 생산하기 이전까지 TSMC를 제외하고 시장의 요구만큼 ARM CPU를 찍어낼 생산력을 가진 업체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으니까.


다른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자. 기업은 이익을 위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돈을 벌면 그만이다. 저 기사의 주장대로 ARM이 모바일용 CPU 중 비중이 높은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앞으로도 ARM CPU는 많이 팔려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팔리는 물건을 '찍어내는 일로' 돈을 번다면 인텔과 ARM 홀딩스 중 과연 어디가 승자라고 할 수 있겠나. 결국 그냥 돈 많이 버는 회사가 승자일 뿐이다. 자존심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생산능력이 있으면서 공장을 놀게 두는 것보단 훨씬 나은데다 앞으로도 ARM CPU의 판매량은 보증수표일 것이기에 인텔의 위탁생산 사업부는 괜찮은 고객 하나를 얻은 셈이다. 이게 도대체 어째서 굴욕이라는건가.


△ 퀄컴의 스냅드래곤 810. 사실상 결함 제품이라 시장을 얼어붙게 만들고 만다.

자, 마지막 관점인 기술력 문제다. 일단 근 10여년간 시장에서 인텔은 뭔가 실수다운 실수를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인텔의 마지막 실수였던 프레스캇의 실패는 일반 소비자 입장에선 조금 짜증스럽다가 끝날 정도의 문제였다. 시장이 황혼기에 접어들기 전에 발생한 일이었기에 일시적으로 인텔의 점유율이 떨어지긴 했지만 시장 전체의 침체를 가져올 만한 위기는 전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인텔이 삽질하는 동안 2인자인 AMD가 제 몫을 충분히 다 하며 시장을 지탱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ARM판 프레스캇이라 할만한 스냅드래곤 810은 시장에 굉장히 나쁘게 영향을 끼쳤다. 스마트폰 시장이 정체기에 다다른 마당에 스냅드래곤 810의 설계 결함으로 인한 발열과 전력 소모는 여러 제조사들을 괴롭히며 시장 전체를 얼어 붙게 만들었다. 공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ARM의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버린 사건이다. 결국 스냅드래곤 820부터는 TSMC 한 군데에서 칩을 찍어내지 않고 삼성전자에서도 일부 물량이 생산된다. 결국 ARM 진영이 세계 최고 수준의 공정기술을 가진 인텔을 공장으로 택한 건 인텔의 굴욕이 아니라 ARM의 굴욕이다. ARM 진영 스스로가 자신들만의 힘으로 시장에서 버텨 나갈 수 없다는 항복선언을 한 셈이니까.


△ 기사에 동조하는 댓글에만 '좋아요'를 눌렀다.

더기어라는 사이트는 예전에 지나가며 몇 번 본 적이 있다. 대체로 모바일이나 가젯 종류를 다루는 사이트이기에 내 관심사에서 살짝 빗겨나있어서 자주 찾지는 않던 곳이다. 진지하게 글을 읽어보니 도대체 이런 말도 안되는 기사를 어떻게 썼나 싶다. 기자 중 한 명이 쓴 기사의 분석이 틀린 것이야 크게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이트의 오너이자 대표 필진이 자기 얼굴을 걸고 올린 글이 수준 이하인 것과 자신의 희망사항대로 사실을 왜곡한 것은 굉장한 문제다. 저런 한심한 글이 올라오는 사이트를 굳이 챙겨봐야 할 필요를 못느끼지 않겠나. 그 와중에 기사에 동조하는 댓글에만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른 것도 너무 유치하다. 그것 말고도 저 기사엔 굉장히 지적할 부분이 많았다. 한 문장 안에 존대와 반말이 뒤섞여 있는 기자의 묘한 자기소개도 그렇고, 두 번째 문단과 세 번째 문단의 첫 문장이 완전히 같은 구조와 내용을 가진 것도 직업 글쟁이라고 보기엔 너무 말이 안되는 실수다.


다시 말한다. 인텔은 패배하지 않았다. 애초에 ARM 진영과 진지하게 싸우려 든 적도 없을뿐더러 최종적으로 인텔이 꺼낸 카드는 'ARM과의 공존'이니까. 저런식으로 진영논리에 휘말린 글을 보고 있으니 참으로 씁쓸하다. ARM과 x86을 나눈 뒤 ARM이 시장을 지배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자꾸 눈에 띄는데 제발 쓸데없는 싸움 붙이려 들지 말고 그냥 둘다 재밌게 잘 쓰라고 권해주고 싶다. 시절이 수상해서 그런지 별 쓸데없는 일에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생긴다. 슬픈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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