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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배의 차이

SWEV 2017.05.05 09:06

나는 숫자를 굉장히 못외우는 편이다. 숫자를 못외워서 현관 도어락의 비밀번호 대신 손가락이 움직이는 방향과 순서를 기억하는 수준. 그래서 키패드의 5번을 좌표 중심축으로 잡고 손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여가며 비밀번호를 누른다. 늘 그런 방식으로 문을 열다가 한동안 집을 떠나있던 탓에 손가락의 움직임을 까먹은 적이 있다. 결국 집의 도어락을 열지 못하고 세 번쯤 실패한 뒤에 문을 두드리는 바보짓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집 비밀번호는 동생 생일이란다. 날짜로 기억하면 기억이 나는데, 숫자들만 가지고 기억하려 하니 내 기준에서는 아주 당연하게도 기억하고 인식하기 어려운 숫자의 나열이었다. 엄마는 비밀번호 하나를 못외우는 나를 보며 어찌해야 할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셨고, 동생은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는 내가 더 심하게 멍청해졌다며 나를 불쌍하게 여겼다.


연애를 할 때도 이런 바보같은 구석은 그대로 적용된다. 연애하는 상대방의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는 것이 무신경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결국 번호를 외워야 마음이 편한데 나는 마음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 몸을 불편하게 만든다. A4용지 한 장을 꺼내놓고 전화번호를 몇백 번쯤 적는 것이다. 그 짓을 한 3일쯤 하다 보면 간신히 외워진다. 내가 상대방을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원래 멍청한 것은 어찌해 볼 수 없는 노릇이라 슬펐다.


△ 나는 12년 전에 이 CPU를 썼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물건인 컴퓨터에서도 나는 예외 없이 멍청하다. 도무지 숫자가 외워지지 않는다. 특히 부품의 세부 스펙 같은 것은 기억을 해내지 못하는데, 드물게 내가 아무 쓸모도 없이 기억하는 숫자가 있다.[각주:1] 노스우드 펜티엄 4에 들어간 트랜지스터 숫자인 '5500만'이 이상하게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대학교 신입생 시절 쓰던 CPU가 노스우드 코어의 2.8Ghz 펜티엄 4였는데, 별 불만없이 잘 썼던 물건이긴 했지만 특출나게 기억에 남을만한 CPU가 전혀 아니었는데도 유독 저 숫자는 잊을 수가 없다. 이 5500만개라는 숫자는 이따금씩 신제품 반도체가 나왔을 때 트랜지스터 내장 개수 이야기를 하게 되면 하나의 기준점처럼 반도체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내가 느끼게 해주는 숫자가 된다.


△ 라이젠의 플래그쉽, 1800X

그리고 얼마전에 라이젠에 내장된 트랜지스터 개수를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48억개 정도가 박혀있다고 한다. 처음엔 48억개면 많구나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노스우드 펜티엄 4 트랜지스터 개수의 100배 가까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성능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트랜지스터 갯수와 성능이 정비례 할리는 없다. CPU 안의 모든 트랜지스터가 연산 유닛에만 들어갈리가 없는데다[각주:2] 측정 방식과 프로그램에 따라서도 성능 격차는 얼마든지 크게 부풀릴수도, 작게 축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략적으로나마 성능과 트랜지스터 갯수의 비례 관계가 보인다면 그건 그거대로 재미있을 것 같았다.


성능비교를 하려면 다른 조건이 다 맞아야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노스우드 펜티엄4가 달린 컴퓨터를 이제와서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노스우드 펜티엄 4가 달린 컴퓨터는 윈도 10이 설치되지도 않는다. 정확히는 노스우드 펜티엄 4엔 윈도 7까지만 설치가 가능한데, 윈도 8부터는 NX-Bit라는 일종의 악성코드 방지를 위한 하드웨어 보호 기능이 CPU에 달려있어야 설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그것 외에도 라이젠은 64비트지만 노스우드는 32비트까지 밖에 지원하지 않고, 여러모로 변인통제를 위해 조건을 정확히 맞추자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가장 좋은 건 여러 변인을 전부 테스트 해보는 것이겠지만, 지나가는 생각을 위해 그만한 헛짓거리를 하기엔 너무 귀찮았다는 것이 문제. 그래서 그냥 온라인상의 벤치마크 데이터베이스를 뒤적거려서 수치를 찾아냈다. 벤치마크 프로그램을 뭘 쓸까 고민하다가 오래된 CPU들의 쓰루풋 측정치가 모여있는 것 중에 요즘에도 쓰이는 프로그램이 씨네벤치 R11.5 뿐이기도 하고, 확장 명령어세트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는 벤치마크 툴이기에 그것을 기준삼아 살펴보기로 했다.


△ 내가 쓰던 노스우드-C 코어와 모든 것이 같고 작동 주파수만 다른 결과값이다.

윈도 XP 환경에서 측정된 값이지만, 내가 신입생 시절에 쓰던 노스우드 코어와 가장 비슷한 물건의 측정치이다. 그리고 라이젠 1800X의 씨네벤치 R11.5 점수는 대충 17~18점 정도이다. 트랜지스터 갯수는 100배 차이인데, 성능은 고작 40배 차이라는 것이 의아했다. 심지어 저건 노스우드 펜티엄 4 중에서도 후기형의 중급기 정도에 해당하는 물건이다. 노스우드 코어의 펜티엄 4는 3.4Ghz까지 출시되었고, 3.4Ghz 클럭을 적용해서 벤치마크를 역산해보면 고작 30배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 싶어서 다른 결과값을 찾아봤다. 노스우드의 트랜지스터 갯수는 4200만개이고, 노스우드 바로 전의 제품인 윌라멧 코어의 트랜지스터 개수는 4200만개이다. 윌라멧 코어를 기준잡고 본다면 얼마나 성능 차이가 나는지 궁금해졌다.


△ 윌라멧 코어는 423핀과 478핀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거의 100배에 육박하는 성능이 나오고 있다. 내친김에 노스우드의 다음 코어인 프레스캇 코어의 벤치마크 결과도 찾아봤다. 참고로 프레스캇 코어엔 총 1억 2천만개 ~ 1억 7천만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있는데, 이건 64비트 지원과 기타 여러가지 추가 명령어 세트가 대량으로 들어가면서 나온 숫자이다. 전세대인 노스우드의 두 배 이상의 트랜지스터가 들어갔으면서도 공정 미세화를 통해 다이 면적은 오히려 2/3 수준으로 줄어들기도 했다.


△ 노스우드와 점수를 비교해보면 프레스캇이 얼마나 망작인지 느낌이 올 것이다.

프레스캇쯤에 가서야 거의 정확하게 아귀가 맞는다. 1억 2천 5백만개의 트랜지스터를 써서 0.53점이라는 점수를 냈는데, 48억개를 쓴 라이젠이 17~18점 정도를 내고 있으니 트랜지스터 숫자와 성능 모두 30배 정도의 차이가 난다. 마침 둘다 소모전력은 엇비슷하게 100와트 언저리이고, 재미있게도 다이 면적은 프레스캇쪽이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참고로 노스우드 펜티엄 4는 다이 면적이 200mm^2 정도인데, 이게 라이젠의 다이 면적과 거의 엇비슷한 수준이라 여러가지로 좀 느낌이 웃기다. 12년의 터울을 두고 만들어진 두 개의 CPU가 비슷한 반도체 면적과 소모전력과 작동 클럭을 가지고 있는데, 내장된 트랜지스터의 숫자는 30배에서 100배 정도의 차이이고 성능도 그 만큼의 차이가 난다.


△ 이 물건엔 아톰 N270이라는 CPU가 달려있다.

얼마전에 인석이가 나의 도전의식을 자극하겠다며 내 방에 들고왔던 물건이 있는데, 초기버전 아톰 CPU가 달린 일체형 데스크탑이었다. 아톰이 지금에 와서야 그럭저럭 참고 써줄만한 성능을 내주고 있지만 처음 시장에 등장했을 땐 정말 여러 의미로 이런 물건이 나올수가 있구나 싶을 정도의 처참한 성능이었는데, 저 루온이라는 컴퓨터에 달린 아톰 N270 CPU의 씨네벤치 R11.5 점수는 대충 0.23점 정도이다. 그리고 저 컴퓨터를 만져본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지인의 라이젠 데스크탑을 조립하면서 씨네벤치를 돌려보았고, 17점이라는 숫자를 보며 감탄했다. 고작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100배의 성능 차이를 가진 컴퓨터를 만져본 셈이다. 무슨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묘하다.


간만에 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글로 황금같은 아침시간대를 날려먹었다. 왜 같은 인텔 CPU끼리 비교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별 이유 없다. 라이젠의 트랜지스터 개수가 48억개라는 기사를 보다가 쓸데없이 시작한 글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현행 인텔 데스크탑 CPU의 플래그쉽인 6950X에는 34억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간단다. AMD가 어떻게 라이젠에 48억개나 때려박고도 인텔의 i7보다 다이 면적을 더 좁게 만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걸 알면 내가 여기 있을게 아니라 지금쯤 실리콘 밸리에 있겠지.


연휴 잘들 보내시라. 그리고 미세먼지와 송화가루를 조심하시라. 어제 화장실 청소를 했는데 창문 열어놓고 잤더니 화장실이 샛노래져서 눈물을 머금고 다시 청소했다. 나같은 바보는 세상에 하나면 족하다. 그러니 마스크를 잘 쓰고 창문을 잘 닫자는 것이 오늘의 결론.

  1. 사실은 내가 별 어려움 없이 외운 전화번호가 있긴 하다. 인석이 아버님의 전화번호이다. 인석이를 괴롭히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니 너무도 쉽게 외워졌다. 인석이 아버님의 전화번호가 쉬운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A4용지 없이도 외우는데 성공해서 인석이가 내 신경을 거스를때마다 크립토나이트나 봉인용 마법주문처럼 잘 쓰고 있다. [본문으로]
  2. 연산유닛 외에도 CPU엔 외부와의 연결을 위한 각종 인터페이스와 메모리 컨트롤러, GPU용 PCI-E 직결 버스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있다. 그리고 이런식으로 CPU안에 거의 모든 기능이 들어있도록 변한 것은 10년이 채 되지 않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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