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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최고의 하드웨어

SWEV 2017. 12. 18. 09:07

또 해가 저물어간다. 뭔가 정리 하는 느낌의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올해도 했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난 딱히 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또 만만한 컴퓨터 이야기다. 제조사와 제품을 가리지 않고 좋은 것, 나쁜 것을 구분해보려 한다.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내 맘에 들면 칭찬하고, 내 맘에 안들면 욕한다. 나는 여기 있는 제품들 제조사와 별 관계가 없는 사람이니 이해관계에 따라 실드 쳐주거나 욕하는 일 따위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제품과 서비스만 가지고 이야기 하고자 한다. 마침 올해는 PC시장이 재밌게 돌아간 덕분에 쓸 이야기가 정말 많을 것 같은데, 글이 얼마나 포만감 있게 나올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써보면 알겠지.



최고의 CPU - AMD 라이젠 1700



설명이 필요없다고 느껴질 정도다. 괴상하게 높은 성능, 이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소모 전력과 발열 등등 소비자에게 이롭기 짝이 없는 특징들을 하나의 제품에 야무지게 모아 담았다. 그 강력함이 결국은 경쟁사 라인업의 전반적인 수정을 끌어냈고, 그 이득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왔다. 수년간 소비자용 CPU 시장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메인스트림급 8코어의 금기를 깨버린 업적만으로도 이 제품은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한 성능을 끌어내기 위해서 쓴 반도체의 다이 면적이 고작 200mm^2에 불과하다는 것도, 그 200mm^2짜리 다이 조차도 불량품을 잘 활용할 방법을 찾아 냈다는것도, 정말 괜찮은 스톡 쿨러가 들어 있기에 소비자의 고민거리 하나가 줄어들었다는 점도 멋지다. 제품 박스마저도 고급지게 나와서 내가 아무 이유 없이 박스를 하나 가지고 있고 있을 정도. 라이젠은 제대로 된 기획과 시장에 대한 명확한 판단,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력등의 삼박자가 골고루 잘 어우러졌을 때 무슨 결과물이 나오는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라이젠을 얹을 수 있는 AM4 소켓은 최소 3년 간의 수명이 보장된다. 그리고 내후년엔 AM4 소켓에서 12코어 제품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일단 1700등의 저렴한 3Ghz 짜리 8코어를 사서 쓰다가 2019년 즈음에 4Ghz를 넘는 8코어로 업그레이드를 한다면 확실하게 빨라진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텔은 어떻냐고? 근 몇 년간 인텔은 'CPU 업그레이드'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 너무 뼈아팠다. 이번 세대 플래그쉽을 사서 쓰고 있으면 마더보드에서 최소한 다음 세대 플래그쉽 정도까지는 지원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된다. 어쩌다 되더라도 성능 향상이 거의 없다보니 돈을 들여서 바꿀 필요를 못느끼는 경우가 더 많았고, 이런식으로 소비자한테 짜게 구는 일은 예쁘게 봐줄 수가 없다.


여기서부터 쿨러에 대한 첨언. 작년도 베스트 CPU인 7700K는 솔더링이 없기에 일반적인 92mm 스톡 쿨러로는 발열을 억누를 방법이 없었다. 결국 7700K는 쿨러를 빼버리고 출시했는데, 그 뜨거운 CPU를 식혀줄만큼 괜찮은 쿨러의 가격이 꽤나 비쌀 걸 생각하면 어설픈 물건 넣어주거나 별도로 좋은 쿨러를 번들로 끼워줘서 제품 가격을 치솟게 만드는 일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라이젠 1700은 발열이 적고 그 발열을 충분히 잘 식혀줄만한 쿨러의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가 않다. 심지어 디자인이 예쁘고 마감이 대단히 좋기까지 하다.[각주:1]


여러모로 올해의 CPU 수준이 아니라 2017년 나온 모든 PC용 하드웨어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제품이다. 내가 주변 사람들한테 적극 권장하고 다녔고 내 조언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 모두가 만족하기도 했다. 사라. 두 번 사라. 세 번 사도 좋다. 간만에 PC시장에 찾아든 이 거대한 혁명을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최고의 마더보드 - GIGABYTE GA-AB350M-Gaming 3

최고의 CPU가 라이젠이니 최고의 마더보드도 라이젠용 마더보드를 골랐다. 레이아웃 무난하고 디자인 말끔하고 가격도 적당하다. 출시 초기엔 14만원 전후로 팔렸지만, 지금은 10만원 미만에 유통중. 마더보드 바이오스에서 핫스왑 기능을 켜고 끌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고[각주:2], 7페이즈 전원부 중 4페이즈만 방열판이 붙어있단 점도 조금 불만스럽다. 허나 전반적으로 무탈하고 가장 안정성 있는 브랜드로 손꼽히는 기가바이트의 제품 특색은 잘 살아있는데다 조립할 때 거슬리는 부분이 거의 없는 레이아웃등은 철저하게 잘 지켜졌다.[각주:3]


유통사가 소비자에게 너무 미움을 산 것이 좀 걱정스럽다. 제이씨현은 코스닥 상장업체지만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소비자의 AS 불만기가 올라온다. 최소한의 고객만족에도 흥미가 없는 수입사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제이씨현만 해도 충분히 문제인데 제이씨현이 운영하는 AS 대행업체인 CS 이노베이션도 문제가 많다. 작년에 MSI의 GTX 1080을 두고 사고쳤던 업체도 CS 이노베이션이고, 고객정보가 날아간 걸 뻔히 알면서도 커세어의 AS를 이관받은 업체도 CS 이노베이션이었다. 여러모로, 정말 상대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짓을 제이씨현은 너무나도 많이 저지르곤 한다. 이런 부분이 나아진다면 훨씬 더 고민없이 추천할만한 제품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혀끝이 조금 쓰다.


유통사로 인해 빛이 바래긴 했지만, 제품 자체의 품질은 믿을만 한데다 올해 가장 핫한 CPU라 할만한 라이젠 1700과의 조합시에 가격대 성능비가 그야말로 쩔어주는 탓에 올해의 베스트 마더보드는 이 제품으로 선정.




RAM - G.Skill Trident Z RGB


나는 별 이유없이 불빛이 들어오는 하드웨어를 정말 싫어하지만, 이 램 만큼은 조금 예외로 쳐주고 싶다. 디자인과 색상의 조합이 너무나도 예쁜데다 PC 튜닝 시장에 처음으로 등장한 컬러조절 가능 부품이기도 하다. 커세어의 팬처럼 하드웨어적으로 부품을 끼웠다 뺀다든가, 아니면 아예 살 때부터 컬러가 정해져 있던 제품은 많았지만 이런식으로 RGB컬러를 마음대로 조절 가능했던 제품은 이 녀석이 처음이다. 처음 등장하자마자 크게 히트할만한 상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그러했다. 트라이던트 Z RGB 출시 이후로 흔히 말하는 PC튜닝 업계 최대의 화두는 RGB컬러 지원이었고, 발빠른 제조사들이 RGB팬과 LED 스트립등을 시장에 출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AMD는 RGB 컬러 조절이 가능한 라이젠 스톡쿨러를 만들어서 끼워주고 있다.


여기에 한가지 더 운이 끼어들었다. 모바일 시장과 IoT 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 D램 시장과 낸드 플래쉬 메모리 시장이 동시에 공급 부족을 겪게 되었는데 낸드는 3D 적층 기술을 이용해서 단위면적당 용량을 크게 키워낼 수 있었으나 D램은 그러한 기술이 없기에 D램쪽만 공급 부족이 심해져버렸다. 결국 국내 PC 조립 시장의 표준이라 할만한 삼성램조차도 가격이 크게 오른 상황에 지친 소비자들은 이럴바엔 해외 직구로 괜찮은 램을 들여다가 쓰자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었고, DDR2 시절과는 다르게 램들이 고전압으로 죽어나가는 일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대가 왔기에 예전처럼 AS문제로 직구 램을 사는게 꺼려질 일도 없어졌다. 결국 RGB 유행을 선도한 트라이던트 Z RGB는 PC 커뮤니티에서 가장 핫한 램이 되었다. 한동안 사람들에게 선망의 RAM 브랜드는 커세어의 도미네이터였지만, 요즘은 너도나도 트라이던트다. 지스킬이 DDR2 시절의 6400HZ와 8500HZ 이후로 이렇게 핫했던 시절이 있을까 싶을 정도.


라이젠과 커피레이크의 출시 덕분에 PC시장이 간만에 활기를 띄기도 했고, 지스킬이 고급 오버클럭용 메모리 시장에서 워낙 오래간 잘 해온 업체이기에 얻어낸 좋은 성과라고 믿고 있다. 박수쳐주고 싶다. 단순히 제품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자격이 있는 제품이지만, 자신이 속해있는 제품군 뿐만 아니라 전혀 관계없는 다른 부품들에게 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더 큰 칭찬을 주고 싶어진다.




VGA - ASUS GTX 1060 6GB EX

작년 이맘때에도 난 GTX 1060을 올해의 VGA라고 뽑았던 것 같은데, 참 슬픈 노릇이다. 1년여간 VGA시장에서 변화따윈 없었고, 되도 않게 채굴 열풍이 불면서 애먼 소비자들만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나마 올해 VGA 시장에서 좋은 일을 찾자면 eVGA가 이엠텍과 함께 국내 시장에 재진출한 것 정도뿐이지 싶은데, 워낙 입고물량이 적어서 수시로 품절나는 걸 떠올리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그냥 아수스 제품으로 골랐다.


아수스의 VGA 라인업엔 굉장히 여러 제품이 있고, 개중에서 소비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주력제품은 STRIX 시리즈이지만, 나는 STRIX 시리즈보단 PH나 EX시리즈에 좀 더 관심이 있다. 다른 이유는 없고 순전히 쿨러가 볼베어링이라서다. PH는 PC방이나 산업용 PC등에서 쓰일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졌기에 소음을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제로팬등의 기능이 빠져있고, 좀 더 저렴한 구성의 쿨러를 달고 나온다. 그리고 EX는 소비자용 고내구성 VGA를 목표로 볼베어링 쿨러가 달린 제품군이다. PH시리즈도 종종 쓰곤 했지만 쿨러가 정말 너무 심각하게 예쁘지 않아서 매번 맘에 걸렸는데 다행히도 GTX 1060 6GB버전의 EX가 나와주어서 고성능과 고내구성을 모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없이 권해주고 있다.


아수스 VGA가 평균적으로 기판 품질이 좋고 원가절감을 위한 장난질을 자주 하지 않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고, 디자인도 좋다고는 못하겠지만 심각하게 못나지도 않은데다 가격도 평균적인 GTX 1060 가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참 좋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아수스의 그 어떤 마더보드와도 깔맞춤이 어렵다는 점인데, 이런 건 신경 좀 써줬으면 좋겠다. EX 자체가 아수스의 중가형 정도 라인업에 해당하기 때문에 PRIME 시리즈 마더보드와 짝을 맞춰 작동할 일이 많을텐데, 아수스의 주력 마더보드 라인업인 PRIME 시리즈는 검정색과 은색으로 디자인 기조를 잡아놓았기 때문이다. PC를 조립할 때 나처럼 깔맞춤에 신경쓰는 사람들에게 아수스는 좀 잔인한 회사이다. 가격대와 제품 포지션이 겹치는 아이들끼리는 색을 좀 같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올해의 VGA는 이 제품으로 선정한다.




SSD - Intel Optane SSD 900P

옵테인 기반의 PC용 스토리지 첫 번째 제품이 대부분의 소비자에게 냉대받으면서 인텔의 3D 크로스포인트 제품군이 어떤식으로 시장을 공략하고 들어올지 궁금했는데 의외로 방법이 단순했다. 압도적인 성능 제공. 900P는 인텔이 만들어낸 모든 SSD중 역대 최고수준의 성능을 자랑하는데, 인텔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 고성능 SSD 시장의 맹주라 할만한 삼성전자의 960 Pro를 상대로도 판정승을 거뒀다. 특히나 가혹한 Load 조건에서의 성능에서 삼성 제품을 꺾었다는 것이 인텔의 스토리지 다운 부분.[각주:4]


스펙상의 순차 읽기 성능은 960 Pro가 1.5배 가까이나 되지만, 어디까지나 벤치마크 툴에서의 제한적인 성능이고 실사용 테스트에서는 900P가 전반적으로 우위를 점한다. 가격이 터무니없을 것 같아서 미디어에 관련 리뷰가 뜰 때까지만 해도 시큰둥이었는데 의외로 해외에서 납득할만한 가격대에 팔리는 것을 보니 나도 마음이 동할 정도다.[각주:5] 뭐가 되었든, 실제 제품을 운용하는 입장에서 기존에 없던 좋은 성능이 나온다는 점은 칭찬받아 마땅할 일이고, 작년에 960 Pro를 뽑으면서도 마음 한켠이 찝찝했던 것[각주:6]을 달래주는 이 제품을 올해의 SSD라 할만하다.




HDD - Western Digital WD60EZRZ

솔직히 말해서, 하드디스크는 이제 '좋은 제품'이랄 것이 없어지는 느낌이다. 뭘 사도 속도는 고만고만하고 좋은 거 끼운다고 소비자가 느끼는 체감성능 차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쁜 제품' 혹은 '아직 잘 모르겠는 제품'은 피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그런 조건들을 적용시키고 나면 시장에서 고를 수 있는 물건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나쁜 제품의 예시로는 SMR 방식의 HDD가 있을테고, 잘 모르겠는 제품의 예시로는 TGMR과 헬륨 충진 기술이 있을 것이다.


데이터 저장용 디스크는 싸고, 적당히 느려도 괜찮으니 데이터 안정성 문제로 일을 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데, 그 부분에서 WD의 EZRZ 시리즈는 굉장히 괜찮은 모범답안이 된다. 5,400RPM 스핀들모터로 가격과 소음을 낮췄고, 경쟁사 제품들이 SMR로 욕을 먹는 동안 꿋꿋하게 기존의 PMR 기술로 플래터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물리적 특성을 공유하는 상위제품[각주:7]이 사고를 쳐서 욕을 먹긴 했지만 반대로 특색없는 EZRZ는 별 문제 없이 잘 팔려나가고 있다.


이 제품만의 특장점을 조금 더 설명해볼까 한다. 시장에서 6TB이상의 디스크중 5,400RPM 스핀들인 제품은 이 60EZRZ와 동사의 60EFRX 뿐이다. 디스크 용량이 6TB쯤 되면 플래터 장수가 늘어나면서 헤드 어셈블리가 전체적으로 비대해지기 마련인데, 이 내부에서 액추에이터 암의 뒷부분이 보이스코일 부분과 충돌하며 나는 소음이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HGST의 5TB, 6TB모델도 해당 이슈로 소비자들의 불만이 컸고, 나도 디스크는 가능하면 HGST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시끄러운 건 정말 질색이라 반신반의하며 사보았는데 확실히 타사의 7,200RPM급 6TB 디스크들에 비해서 조용했다. 헬륨 충진기술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도 좋다. 제조사야 안정성에 문제가 없다며 이야기를 하지만, HDD같은 제품을 고를 때 새로운 기술이 적용된 것은 피하고 싶은게 내 마음이다. 시간이 안정성을 검증해주지 않은 헬륨 디스크보단 헬륨 없이 쓸 수 있는 최고용량의 저소음 디스크라는 점에서 60EZRZ를 올해의 HDD로 고르겠다.



케이스 - Fractal Design Define R5


나온지 한 참 지난 제품을 올해의 케이스라고 꼽는 것이 조금 민망하긴 한데, 경쟁 제품들이 전부 떨어져 나가면서 독보적인 물건이 되었기에 소개차 적는다.


처음 Define 시리즈가 런칭될 때는 안텍의 Performance One시리즈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저소음에 치중을 둔 설계, 베젤 전체가 도어로 가려지는 구조, 헤어라인을 강조한 디자인 등등, 소비자가 보기엔 이거 카피 아니냐고 오해할만한 구석이 많았단 이야기. P18X 계열의 독특한 내부구조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케이스는 껍데기이기에 모양이 비슷하면 아무래도 의심부터 받기 마련이다.


헌데, 시간이 지나면서 프랙탈 디자인은 디파인 시리즈를 잘 가꿔나가며 일단 사보면 누구나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최고수준의 미들타워 케이스를 만들어냈다. R5는 디파인 시리즈의 최신 제품이고, 그간 차근차근 더 나은 제품이 되어가던 디파인 시리즈에서도 최고수준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유행타지 않는 말끔한 디자인과 칼같은 마감,[각주:8] 넉넉하고 여유로운 섀시 공간, 필요에 따라 상단을 오픈하면 SLI나 오버클럭도 버텨내는 공기 흐름, PC 소비자에게 부족할 리가 없는 8개의 스토리지 베이 등등 여러모로 비싼 컴퓨터를 조립한다 칠 때 가장 무난하게 고를 수 있는 좋은 제품이 되어주었다. 이따금 조립을 잘못한 뒤 온도가 높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팬 방향을 정상적으로 세팅해준다면 문제 없다. 조립을 잘못한 일부 후기를 보고 저소음 케이스이니 당연히 온도가 높을 것이라 지레짐작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적어도 700~800W급 발열까지는 상단 쿨러 없이도 충분히 열배출이 가능하니 고민하지 않길.



파워 서플라이 - Antec Neo ECO Classic 550W



가격을 생각하면 황당할만큼 구성이 좋다. 전체 일제 캐패시터, 80플러스 브론즈 인증, 2볼 베어링 쿨러에 싱글레일, 99%의 1GPU를 견딜 수 있도록 살짝 넉넉한 550W의 용량[각주:9] 등등 '도구로서의 PC'에 요구되는 거의 모든 요구 성능을 전부 충족시켰다. 인지도 없는 회사가 저런 물건을 55000원에 내놓아도 심각하게 고민해볼 정돈데, 심지어 안텍이다.


그간 국내에서 안텍의 중보급형을 담당하던 파워 라인업은 VP 시리즈였는데, VP와는 다른 유통사를 통해 다른 라인업이 런칭됐다. VP도 가격을 생각하면 훌륭한 구성이었지만, 네오 에코는 볼베어링과 80플러스 인증, 솔리드 캐패시터와 같은 차별화 요소가 분명히 있다. 효율 정도만 제외하고는 거의 10만원대 구성이라고 해도 될 정도인데 이게 어떻게 이 가격에 튀어나왔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포장까지도 참 품질이 좋아서 손가락 굵기의 에어캡이 들어가있다. 정말 정말 잘 나왔다. 남한테 골라줄 때 이거 이상의 파워는 필요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다. 100만원 이상의 PC를 사야 한다면, 고민없이 이 제품을 추천하겠다. 그러므로 올해의 파워로 선정.




비판이 필요한 부분들


AMD의 CPU 사업부는 올 한해 눈부신 성과를 냈지만, GPU 사업부는 어디까지 주저앉을지, 아니 무너질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올해 AMD의 플래그쉽인 베가를 보면 정말 어찌해야 하나 싶을 지경. 경쟁 제품보다 느리고, 경쟁 제품보다 비싸며, 경쟁 제품보다 전기를 많이 먹는데다 경쟁 제품과는 다르게 시장에서 구할 수 조차 없다. 살 마음도 없는데 살 수도 없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들어진 제품군인가. 지금 시점에서 베가를 써서 얻는 이득이라곤 AMD의 CPU/GPU와 칩셋을 쓰면서 생기는 AAA 조합이 기분 좋다는 것 뿐이다.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여러모로 힘에 부치는 싸움인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지는 싸움은 소비자 입장에서 도무지 봐줄 수가 없지 않겠나. 스톡 쿨러가 예쁘다는 것 빼고 베가가 지포스 10시리즈보다 나은 구석이 있기나 한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단순히 베가가 망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걱정스러운데, 내년엔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일단 GPU 사업부의 수장이 없다. 라자 코두리가 경쟁사인 인텔로 이직해버렸는데, 이게 AMD로는 게임 좀 빠르게 못한다는 수준 이상의 훨씬 더 큰 문제가 된다. 내년엔 AMD의 데이터센터용 CPU인 에픽이 본격적으로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나서야 하는 타이밍이고, 에픽과 라데온 인스팅트의 조합은 인텔과 테슬라의 조합을 가격대비 성능면에서 따라가며 싸워야 하는데, 라데온이 엉망이니 라데온 인스팅트라고 제대로 경쟁이 가능할리가 없다.[각주:10] CPU와 GPU를 동시에 만들어 대량 납품이 가능하다는게 현재로서 AMD가 거대한 경쟁사 두 곳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략법이고, 그걸 위해 공들여 짜놓은 인터페이스가 인피니티 패브릭인데, 그 IF를 이용해서 뭔가 해보기도 전에 일이 이리 되니 참 기분이 그렇다는 거. 뭐 나보다 유능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단이니 어떻게든 해법을 찾아내겠지만 그 긴 시간을 소비자는 무슨 수로 견뎌야 하나 싶다.




내가 리안리의 케이스 제품 전반에 별 흥미가 없는 편이지만, 리안리의 O 시리즈는 정말 문제가 심각하다. PC에서 케이스를 쓰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 정도 된다. 부품의 고정, 부품의 냉각, 외부 이물질이나 낙하물로부터의 부품 보호, 그리고 전자파 차폐이다. 이 네 가지 이유 중 소비자의 직접적인 안전을 위한 이유는 순전히 전자파 차폐 하나뿐인데, 강화유리를 한 면에 온전히 발라버린 이런 물건은 케이스의 존재 가치 중 가장 중요한 하나를 스스로 날려버린 셈이다.


전자파를 막아주지 못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강화유리는 PC 케이스의 소재로 부적합한데, 강화유리 특유의 자파 현상이 더 큰 문제가 된다. 제조 공정에서 발생하는 응력, 케이스를 조립하면서 발생하는 이런 저런 눌림 등등이 겹쳐서 가만히 있던 케이스의 유리가 자기 혼자 깨지는 것이다. 단순히 깨지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산산조각이 나면서 이리저리 파편이 튀고 PC 부품과 소비자들에게 쏟아지곤 한다. 이런 소재를 도대체 PC에 왜 써야 하는가?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리안리 O시리즈를 선두로 해서 여러 업체의 강화유리 케이스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이러한 유행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나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을 지경이다. 리안리가 매번 공학적인 부분을 무시하고 특이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엉뚱한 물건들을 쏟아내도 나는 그러려니 했지만, 소비자의 안전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소재를 유행시켰다는 점에서 온갖 종류의 비판은 다 몰아줘도 모자람이 없다는 생각이다. 올해의 최악의 케이스 업체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리안리를 꼽겠다. 사지 마라. 나는 정말 사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 철판떼기로 된 케이스를 써라. 부탁이다.




마치며

독설로 마무리하는 글을 쓰고 싶진 않았는데, 리안리란 회사가 참 문제가 많다. 뭐 리안리도 리안리지만, 라이젠 출시 전후로 비판받던 인텔의 행보도 그렇고 애먼 채굴열풍 때문에 스트레스 받았던 소비자들을 떠올리면 올해처럼 여러모로 일이 많았던 시절도 드물었다는 생각이다.


다행히도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은 있다. CPU의 쓰루풋 성능은 몇 년만에 제자리 걸음을 벗어나 큰 상승을 기록했고, 내년엔 메모리 가격도 조금은 내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 올해 나온 대부분의 PC 케이스들을 별 감흥이 없었지만, x86시장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는 증명된 한 해였기에 내년의 신제품들도 기대해봄직 하다.


날이 춥다. 다들 건강 관리 잘 하시라. 조금 이르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1. 인텔의 스톡 쿨러는 플라스틱 부분 마감이 좀 거친 편이다. 아마도 재생소재를 사용한것이 아닐까 싶다. 인텔이 원래 성능에 크게 영향 없는 부분은 별도로 돈을 들여가며 다듬지 않는 편이기도 해서 이해는 한다. 인텔 SSD들의 바닥면이 대단히 지저분했던 것을 떠올리면 뭐... [본문으로]
  2. 아수스의 제품들은 바이오스에서 개별 포트마다 핫스왑 기능을 켜고 끌 수 있다. [본문으로]
  3. 반대로 아수스의 중보급형 제품들은 대체로 조립이 좀 짜증스러울 때가 많다. 특히 S-ATA포트나 USB 3.0 전면 헤더가 그렇다. [본문으로]
  4. 예전부터 인텔의 SSD는 벤치마크 프로그램에서의 성능은 경쟁제품보다 떨어지면서도 가혹한 환경을 가정하고 만든 테스트에서는 오히려 성능이 더 나은 일이 종종 있었다. 대다수의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나는 공업제품이 극한의 환경에서 잘 버텨주는 일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믿기에 이 방식도 좋아하는 편. [본문으로]
  5. 슬프게도 내 컴퓨터엔 M.2도, U.2도 없어서 쓸 수 없다... [본문으로]
  6. 국민연금과 삼성물산 사이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삼성의 모든 제품들을 멀리하고 싶어질 정도다. [본문으로]
  7. WD의 NAS용 HDD제품인 레드 제품군이 광고와는 다르게 제품 설계 결함으로 24/7 환경에서 정상작동이 불가능하다는 스캔들이 있었다. 나는 이게 올해 HDD시장에서 가장 한심한 이슈라고 생각하고 있다. [본문으로]
  8. 디파인 R3 시절엔 마감이 좀 시원찮은 구석이 있었는데, 디파인 R4 시절에 제조 공장이 바뀌면서 이젠 업계에서 최고라 할만하다. [본문으로]
  9. 요즘이야 1GPU의 VGA가 250W 이상 소모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지만, GTX 480부터 GTX 780 시절까지는 VGA 혼자 360W를 퍼먹는 경우도 있었다. 500W의 용량으로 Peak치 360W짜리 VGA는 조금 불안하지만, 550W는 그런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다. 작은 차이로 제품의 활용성을 크게 넓힌 좋은 예라 할만하다. [본문으로]
  10. 사실 라데온의 낮은 전성비는 게임 성능이 보다는 연산 성능에 치중한 설계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낮은 생산량과 복잡한 공정, 높은 가격이라는 걸림돌은 여전히 서버 시장의 소비자들에게도 용서되기 어려울 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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