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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잠수함

SWEV 2014. 10. 13. 16:19

억지로 끌려와 군복을 입은 병[각주:1]들에게 조국과 민족 같은 단어를 꺼내는 사람들이 있다. 최저시급도 받지 못하고 죄수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일하는 젊은이들에게 저런 지휘관은 얼마나 한심한가. 대령을 달 정도로 꽤나 성공적인 군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마저도 쉽게 저런 바보짓을 한다. 자신의 말 몇 마디가 부하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란 착각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한숨이 푹푹 나온다. 착각에 빠져 사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 군에서 사람을 평가하고 뽑는 기준도 의심스러워진다.


△그레이트 간지 라미우스 함장님

6살 때 외갓집에서 톰 클랜시의 붉은 10월이라는 소설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책의 앞부분에 작품 속의 주역함인 아쿨라급 잠수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사진이 화보로 실려있었던 기억이 난다. 보통 배를 만들 땐 소금기를 품은 물과 바람에 배가 녹스는 것을 막기 위해 특수한 페인트(방청도료)를 칠한다. 그리고 문제의 그 소설책에 실린 사진엔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검은 잠수함 대신 붉은 방청도료만 칠해진 상태의 거대한 구조물이 찍혀있었다. 얼마 후에 미술학원에서 선생님이 잠수함을 그려보라고 하시길래 나는 책에서 본대로 빨간색 잠수함을 그렸고 그날 저녁 우리 엄마는 미술학원 원장님에게 전화를 받아야 했다.


△건조중인 미 해군 버지니아급 잠수함

선생님은 빨간색 잠수함은 없다며 나를 타이르셨지만 내가 본 책엔 빨간 잠수함이 분명히 있었다는게 문제다. 그리고 빨간 잠수함은 구글에서 'submarine under construction' 이라고 이미지 검색을 하면 찾을 수 있다. 그 원장님은 비틀즈 노래도 안듣고 살았나 싶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안타깝다. 노란 잠수함도 있는 마당에 빨간 잠수함이 없을 이유는 뭐란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도, 아이를 가르치는 입장이면 아이들의 상상력을 꺾지 않도록 애쓰는게 맞을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인지 지금도 좀 궁금하다.

 

나는 의문과 의심이 많은 내 성격이 자랑스럽다. 생각을 멈추지 않는 내 성격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가장 큰 유산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쓸데없이 삐딱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애써야만 한다는 걸 알고있다. 내가 본 것과 내가 생각한 것을 지나치게 믿지 않기 위해 나를 미워하고 나를 의심해야 한다. 나는 여단장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길 바라고, 미술학원 원장님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생산직 직원들이 아침마다 출석을 부르는 장소인 공장 현관에 파이팅 구호가 적혀있는 것을 보았다. 생산직 노동자들은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이고 회사의 사정에 따라 아무때나 잘리고 다시 들어오곤 한다. 그런 사람들한테 품질이니 비전이니 같은 단어를 아침마다, 그것도 머리 위로 손까지 올려가며 크게 외치라고 써놓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정신없는 놈인지 참 궁금하다. 내키는 대로 사람을 마음껏 자르고 뽑는 주제에 회사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길 바란다는게 나는 참 어처구니가 없다. 진짜 똥오줌도 못가리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싶어 혀를 끌끌 찼다.


출석을 부르는 상급자마저도 저 헛지랄이 눈꼴시렸는지 간단하게 이름만 부르고 넘어갔다. 내가 삐딱한건지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건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머리가 아프다.

  1. 흔히들 의무복무중인 병장 이하 계급의 군인을 '병사'라 부르지만 군에서 쓰는 정식 명칭은 '병'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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