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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앵글과 안철수

SWEV 2016. 1. 25. 08:42

커트 앵글이라는 프로레슬링 선수가 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솜씨 좋은 선수이기도 했고 링 위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캐릭터 덕에 인기가 있었다. 나도 아주 좋아한다. 특히 그의 등장 음악인 'Gold Metal'은 진짜 좋다. 가끔 울적할 때 일부러 틀어놓고 걸을 정도로 말이다.


△ 그를 상징하는 포즈, 스톤 콜드처럼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리지 않아도 충분히 멋지다.

커트 앵글의 인기가 좋았던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You Suck'이란 단어의 존재가 가장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원래는 엣지가 커트 앵글이 등장할 때 커트 앵글을 야유하기 위해 등장 음악인 Gold Medal의 박자에 맞춰 You Suck을 외치던 것이 시초인데, 어느 순간 부턴가 모든 관중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도 커트 앵글만 나오면 그냥 You Suck이다. 그가 각본상 선역을 맡든 악역을 맡든 전혀 관계없다.[각주:1]


△ 나중엔 스스로 You Suck을 외치며 관중들과 소통한다.

"너 좆같애" 라는 말을 노래하듯 외치던 관객은 그를 모욕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그냥 적당히 박자가 맞고 웃기기도 하고 뭔가 묘하게 착착 붙는 느낌이 들었던 하나의 구호일 뿐. 동영상을 보아도 커트 앵글은 관중들의 욕과 환호를 모두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 나중엔 심지어 스스로 You Suck을 외치다 못해 흥에 겨워 바닥에 누워 뒹군다. 이 사람은 이렇게 멋진 남자였다.


△ 하필이면 일요일에 탈당을 해서 '짜파게티 요리사'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안철수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며 많은 사람들이 안철수를 욕했다. 그리고 개중에는 후원금 계좌로 '18원'을 쏴서 그를 조롱했던 사람도 나왔다. 18은 누구나 아는 욕설이고, 보낸 사람 이름엔 심지어 '트로이 목마'라고 써놓기까지 했다.


폭력은 안쓰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정치인들을 상대로 한 언어폭력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면, 소위 말하는 '높으신 분들'이 민초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만들 방법이 저것 말고는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신분제 사회이던 조선시대에도 탈춤추던 광대들이 극중에서 양반을 욕보이는 것은 허락해줬다. 하물며 신분제가 아닌 현대 사회에서 말해 무엇할까. 우크라이나에선 나쁜 법을 입안한 국회의원이 성난 시민들의 손으로 쓰레기통에 쳐박혔고, 마가렛 대처가 죽은 날 영국 국민들은 "잘 뒈졌다 썅년."이라며 환호했다. 절대로 내 뜻대로 의역한게 아니라 정말 시민들의 반응이 그러했다. 잘못한 정치인들을 상대로 국민들이 쓸 수 있는 방법이라는게 생각보다 정말 많지 않다. 특히나 욕을 먹을 정도로 큰 잘못을 한 정치인들은 각종 부정부패로 충분히 부유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기에 다음 선거에서 떨어진다 한들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기도 하니 더더욱 그렇다.


20대부터 50대까지 모두가 안철수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 기대만큼의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나는 18원이라는 조롱과 욕설을 허허 웃으며 받아들일만한 배포가 있길 바랐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유롭게 웃어넘기며 더 잘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면 그를 비웃은 사람들조차도 한 번 쯤은 다시 돌아봤을텐데, 보좌관이 나서서 깽판을 놓으니 그럼 그렇지 싶은 마음만 더 들어버렸다. 커트 앵글과 문희준 같은 그릇을 보여줄 순 없었나 싶어 아쉽다. 속좁은 사람이 대통령쯤 되는 자리에 앉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우리는 2012년 대선 이후로 너무나도 많은 사례를 보아오지 않았나.


△나는 이게 절대로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에게 1818이란 메시지를 날리는 일이 유치하다는 사람도 종종 나온다. 조금 걱정스러울 부분도 있긴 하다. 어디 내뱉을 길이 없이 쌓여만 가는 국민들의 분노가 이젠 서로서로를 겨누고 있다는게 종종 느껴지는 요즘이니까. 시덥잖은 일에도 쌍욕이 오가고, 드잡이질을 하기 일쑤다.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어줄 여유가 갈수록 없어져 간다는게 피부에 직접 와닿는다. 이건 정말 슬픈 일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이렇게 직설적이고 여과 없는 방법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위정자들에게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날 후원금 계좌에 1818이 도배되어 있다면, 긴장해야 할 것이다. 운좋게 다음 선거에서 또 당선된다 한들, 당신의 잘못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니까.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야 없다지만 방사능 폐기물을 국민의 대표로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겠나. 국민들이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또다른 방법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 차라리 다행이라는 마음도 든다.


다만, 조심은 해야 할 것이다. 성난 군중들의 폭력이 애먼 사람에게 몰리는 일 또한 없어야 옳다. 스스로의 폭력이 맞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는 휘두르기 전에 한 번쯤 의심해 보길. 그런 의심의 과정이 없다면, 그토록 혐오하던 못된 일부 정치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 테니까.

  1. 프로레슬링은 기본적으로 각본이 다 짜여있다. '스포츠'가 아니라 '스포츠 드라마' 정도라고 생각하는게 편하다. 그렇기에 선악이 수시로 뒤바뀐다. 커트 앵글도 여러 시나리오에서 선역과 악역을 넘나들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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