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V

탄핵과 관련된 몇 가지 생각 본문

생각

탄핵과 관련된 몇 가지 생각

SWEV 2017. 3. 11. 16:41

#1.

많은 곳에서 축하가 이루어 지고 있지만, 나는 축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없다. 사람들은 뒤늦게라도 '정의'가 구현됐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뒤늦게'가 너무 뼈아프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십수년 전으로 뒷걸음질 쳤고, 세월호에선 억울한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으며 백남기 농민은 권력의 물대포에 숨을 거두었다. 김관홍 잠수사가 유서로 남긴 뒷 일을 부탁합니다 라는 말이 나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모든 비극은 그 '뒤늦게' 때문이다. 그리고 이 '뒤늦게'를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아파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거대한 고통과 슬픔 앞에 축하라는 단어를 들이밀 자신이 나는 없다.



#2.

감성적인 해석을 떼어내고 순수히 민주주의적 시각에서만 보더라도 탄핵이 기쁠 일은 아니다. 대통령 선거가 손바닥 뒤집기처럼 가벼울 일이 아니기에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끌어내렸다는 사실이 잘했다고 칭찬 받을 일이 못된다는 것이다. 이미 배달 받은 음식을 취소할 수 없듯이, 이미 뽑은 대통령은 어찌해볼 수 없다. 모두 우리의 과오다. 나는 박근혜를 뽑지 않았지만,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조금 더 열심히 설득하지 않았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내가 조금 더 괜찮게 말을 하고 글을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면 결과가 조금 나아지지 않았을까, 우리네 지금 삶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오만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모두에게 이런 반성의 마음가짐이 없다면 미래가 없을 것 같아 두렵다.



#3.

그러니까 기뻐하지 않았으면 한다. 스스로 저지른 크나큰 잘못을 되돌리기 위한 첫걸음을 이제사 내딛었을 뿐이다. 엉망으로 망쳐둔 일을 수습하며 기쁠 순 없지 않겠나. 그나마 다행이라는 감정 정도면 족하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 개중엔 내 이웃과 내 가족도 끼어있을 것이다. 개인이 아닌 국가의 시점에서 보아도 달라질 것이 없다. 헌정사에 남을 커다란 상흔이 하나 더 생겨난 일이고, 망가질대로 망가진 민주주의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라는 커다란 숙제가 아직도 남아있다.



#4.

다음 대통령은 문재인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고 나 또한 그를 지지하고 있으나 한 가지 걱정이 가시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우리가 그를 너무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5공 청문회때 분노를 토해내며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재명, 안철수, 유승민등의 다른 대권 후보들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자아를 돌출시켰기에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떨지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충분히 많았고. 그런데 문재인은? 너무나도 모범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으로만 비춰진다. 하다못해 어제 팽목항 비공개 방문조차도 그렇다. 너무나도 노련하고, 너무나도 세련됐다.


박근혜처럼 멍청한 리더는 국민들이 힘을 모아 끌어내릴 수 있었지만, 이명박은 썩은내가 풀풀 풍기는데도 퇴임 4년이 지나도록 손도 대지 못하는 상태다. 이명박이 그나마 박근혜보단 똑똑하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현재까지의 문재인은 이명박보다 훨씬 자기관리에 능한 모습이 여럿 보인다. 그럴 일은 정말 없길 바라지만, 우리가 상상하던 대통령 문재인과 실제 문재인의 모습이 다르다면 우리는 건국 이래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리더를 만난 셈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지는 하되 온전히 믿지는 않아야 옳다. 사실 어떤 정치인이든 이렇게 비판적 지지를 하는 것이 가장 건전하겠지만.



#5.

탄핵 심판을 이후로 이런 저런 기사들을 뒤적거리다가 의외의 사실을 하나 알았다. 대통령측 변호인단 중 한 명인 서성건 변호사가 맞는 이야기를 하더란 것이다.


요약하자면, '국회에서 소추안을 낼 때 포함되지도 않았던 헌재 불출석이 평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법리적으로 부당하다.' 라는 주장이다. 맞는 말 같다. 적어도 논리에 틀림은 없어 보인다. 국회는 이래서 탄핵해야 합니다 라고 주장했고 탄핵 심판은 그 '이래서'가 타당한지만을 검증하는 절차니까. 소추에 박근혜가 불출석하는 내용은 들어있지 않았을터이니 그건 애초에 판단 기준에서 배제하고 보는게 맞지 않나? 이건 민사의 원칙이긴 한데 누가 좀 가르쳐 줬음 좋겠다. 내가 법대생이 아니라서 일반상식만 알고 있기에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저 말로 미루어 보아 한 가지 사실을 더 알았는데, 적어도 서성건 변호사는 변호인으로서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밥값을 다 했다는 점이다. 박근혜가 헌재에 출석을 하든 말든 그게 법리적으로 탄핵 선고 자체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을터이니 일부러 내보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니까. 박근혜가 제발로 헌재에 나갈 위인도 아니고 어거지로 끌고 가려면 그럴만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 명분이 적어도 법리적으로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서석구 변호사는 자기 본분과 직업윤리에 충실하게 의뢰인을 보호한 셈이 됐다. 세간에서 변호인단이 오합지졸이라며 비웃고 있었지만, 개중엔 저렇게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조금 놀랍다. 물론 패소했으니 결과를 두고 할 말은 없겠지만 말이다.


한 가지 더, 이 사람의 말 대로라면 헌재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선언한 것과 달리 실제로는 굉장히 정치적이고 정무적인 판단을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지금 당장이야 이 분위기에 문제삼는 사람이 없겠지만, 이게 나중 가서 논쟁거리가 될 여지는 좀 있지 않나 싶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