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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파이와 탕수육

SWEV 2014. 12. 15. 01:12

 

 

어릴 적에 빅파이를 무지하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한 개에 고작 50원. 100원짜리 동전 한 개면 빅파이를 두 개나 먹을 수 있었다. 퍽퍽하고 그냥 뻔한 과자였지만 주스와 같이 먹으면 무지하게 맛있었고 한 상자를 사면 세로로 가득 줄을 맞춰 들어있던 물건이라 가격대비 양도 풍성했다. 빅파이가 'Big Pie'가 아닌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알았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Vic'Pie 였기에 이름만 빅이지 실제로 크지도 않네 하던 내 생각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대 후 흔히 말하는 '곽과자'를 한참 먹어대던 시절, 예전의 그 맛이 그리워 빅파이를 찾았다. PX병이던 승민이는 빅파이를 찾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 했는데 박스를 보니 예전이랑 뭐가 많이 다르다. 가운데 난데없이 딸기잼이 들어있다고 하고 뭐 여튼 뭔가 예전 그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기대를 머금고 샀다.

 

지옥같았다. 초코에 딸기가 섞인 맛만 해도 끔직한데 같이 먹으려고 산 오렌지 주스 맛까지 무슨 알 수 없는 조합으로 섞여 가지고는 찐득하고 이상한 뒷맛이 났다. 확실히 크기는 예전보다 커진 것 같은데 저놈의 딸기잼은 도저히 용서가 안된다. 나는 딸기를 좋아해서 베라에 가면 베리베리 스트로베리만 먹고 스무디 킹에서는 스트로베리 익스트림만 먹는 사람인데도 그렇다.

 

 

대학을 오니 밥을 자주 사먹게 되었는데 정말 신기한 건, 탕수육/짜장/짬뽕을 동시에 잘하는 집은 이상하게 없다는 것이다. 면 종류가 괜찮으면 탕수육이 엉망이고 탕수육이 괜찮으면 짜장면이 맛없기 일쑤다. 그래서 뭔가로 허기를 면하고 탕수육을 시켜먹거나 아니면 완전히 야식으로만 탕수육을 시켜먹곤 했다. 다행히도 대학가 근처라 음식 인심은 좋아서 탕수육 대짜를 시키면 세 명이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야식을 먹으려 하니 탕수육이 땡겼다. 아이들에게 알아서 주문하라고 하고는 돈만 냈는데, 탕수육 소스 색깔이 이상하다. 보기만 해도 입질이 오는 그 알듯 말듯한 주홍색의 소스가 아니라 갈색의 소스다. 먹어보니 케찹이 아니라 굴소스로 만들어낸 소스 같았다. 중국식 탕수육인 꿔바로우는 찹쌀로 만든 튀김옷에 굴소스를 이용해 소스를 만들고 센 불에 볶아서 내야 한다는 거 나도 안다. 케찹으로 만든 소스는 중국집 사장님들이 돈을 아끼기 위해 부린 꼼수였던거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오리지널 탕수육이 어떻든 말든 난 케찹 소스를 찍는게 아니라 부어 먹는게 더 좋던 사람이었고,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이젠 그렇게 만들어 주는 중국집이 없다. 죄다 굴소스를 쓴 탕수육 뿐이다. 뜨거운 소스를 부어서 적당히 눅눅해진 고기의 맛을 새콤달콤하게 감싸주던 그 케찹 소스의 맛은 적어도 이제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없다. 미칠 노릇이다.

 

빅파이나 탕수육이나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돈 써가며 고급화를 시도했는데, 둘 다 내 입맛에 영 안맞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고작 몇 년이 흘렀을 뿐인데 내가 좋아하던 그 맛은 사라지고 없다니. 차라리 가격이 오르지 않았다거나 혹은 양이 더 늘어났다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다.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선 업그레이드라고 내놓았지만, 정작 내 입장에서는 다운그레이드다. 그리고 이런 일은 음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예쁘긴 하지만 실용적이진 않을 디자인

 

요즘의 스마트폰이 그렇다. 크기는 갈수록 커지고, 기능은 갈수록 늘어난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장의 흐름이 그렇다. 굴소스가 들어간 탕수육처럼, 딸기잼이 들어간 빅파이처럼 내 취향과는 영 맞질 않는데도 사람들은 업그레이드가 되었다며 제품을 내놓고 또 산다.


취향이니 뭐니 깐깐하게 따질 수 있는 시장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2011년도의 스마트폰들은 지금 기준에서 보면 엉망인 물건들이었지만 액정 크기도 다양했고 특이한 물건들도 많았다. 아트릭스의 도킹과 지문인식은 혁신이었고, 넥서스 S의 곡선은 아름다웠다. 그때 당시에 델에서 뜬금없이 내놓은 5인치짜리 스마트폰을 보며 이걸 도대체 어떻게 쓰나 싶었는데 3년이 흐른 지금, 시장의 주력 제품들은 이미 5인치를 넘어 5.5인치를 향해 달려간다. 갤럭시 S6도 5.5인치 2K 화면이 들어갈 예정이라는 소문이 있고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모토로라나 HTC의 철수는 정말 뼈아프다. 이젠 소니 정도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시피 하다. 사람들은 엘지 삼성만 찾고 그중에서도 플래그쉽 모델만을 찾는다. 지속적인 세뇌 끝에 취향마저 잃어버린 것일까? 나에게 와닿지 않는 업그레이드 마저도 수용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너무 그지같다. 빅파이도, 탕수육도, 스마트폰 시장도 뭐 하나 뚜렷하게 마음에 드는게 없다. 취향이 사라져 가는 세상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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