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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미 본문
컴퓨터 업계에서 엔비디아처럼 극단적으로 좋고 싫음이 뚜렷한 회사가 드물다. 엔비디아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크고 지배적인 회사가 일단 잘 없는데다 만약 있더라도 그 정도 쯤 되는 회사면 욕 먹지 않도록 알아서 잘 하기 때문이다. 인텔이 그렇다. 컴퓨터 업계에서 인텔은 칭찬 받느라 24시간이 모자란 회사다. 인텔 안티를 외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프레스캇 사건 이후로는 인텔이 특별하게 실수하거나 지저분하게 장사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 2013년도 최고의 짤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엔비디아는 참 욕을 많이 먹는다. 회사로서의 존재감이나 무게는 인텔 뺨치게 큰데도 거의 동네북 신세다. 모바일 사업부에서 이런저런 바보짓을 한 것들도 원인일테고 저 위의 리누즈 토발즈가 분노의 뻐큐를 날릴 만큼 리눅스쪽 지원이 형편없는 것도 이유가 될 만하다. 인텔의 경우엔 쓸 게 없어서 욕 나오지만 어쩔 수 없이 참고 쓴다는 사람이 잘 없는데, 엔비디아는 희한하게 팔기는 잘 팔면서도 오만 욕은 다 들어먹는다. 엔비디아 사용자들은 다들 츤데레인가?
몇 년째 계속 지포스만 사용하고 있지만 딱히 지포스를 선호하는게 아니라 그래픽카드를 사야겠다 마음 먹을 때 즈음이면 항상 중고 시세가 괜찮거나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 제품이 우연하게 싸게 매물로 나오거나 그래서다. 근데 그런 타이밍의 문제와 별개로 엔비디아라는 회사를 나는 많이 좋아 하는 편이다. 그 이유를 보면...
첫 번째로, 상상도 못할 아이디어를 내놓고 그것을 현실에서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특히 CUDA나 Maximus는 정말 놀라운 발상이었다. CUDA는 막 나올 시점 즈음만 해도 별 볼일 없는 해괴한 기술이었는데, 지금은 안쓰이는 데가 없을 정도고, 심지어 다음 팟인코더 같이 대중적인 프로그램 마저도 CUDA를 지원한다. 그래픽카드의 남아도는 성능을 이용해서 CPU가 해야할 반복 연산 작업을 대신 해내다니, CUDA는 정말 혁신 그 자체다. Maximus는 더하다. '실시간 렌더링' 이라니, 단어 조합이 너무 이질적인 느낌이다. 마치 '간부 불침번'이나 '가톨릭대 목탁 제조학과' 같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엉뚱하고 꿈같은 개념을 현실화 시켰다. 이건 칭찬 안해줄 수가 없다.
두 번째로, 경쟁사 제품들보다 잡스런 문제가 덜하다. AMD의 드라이버인 Catalyst가 한국에서 '까탈리스트'로 불리며 욕을 먹는건 PC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테고, 나도 몇 차례 겪어보았다. 엔비디아처럼 그냥 드라이버 판올림을 했을 뿐인데 갑자기 화면이 뻗어버리거나 하는 황당한 일을 두어차례 겪고 나면 요즘 많이 나아졌다는데 써볼까 싶다가도 괜히 스트레스 받기 싫어서 손이 안갈 때가 많다. 예나 지금이나 컴퓨터는 나에게 취미이자 '장비'이고 장비는 열받지 않으면서 쓸 수 있어야 제 몫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부분에서 엔비디아의 제품군들은 이런저런 자잘한 문제가 드물어서 참 마음 편하게 고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물리학자의 이름을 제품 코드명이나 정식 명칭으로 쓴다. 황회장이 물리학에 관심이 많은지 묘하게 엔비디아의 2011년도 이후 제품군들은 죄다 물리학자의 이름을 쓰고 있다. 가장 최근 제품인 GTX980은 전자기학의 아이작 뉴턴이라 할만한 맥스웰이 개발 코드명이고, GTX 680은 최초의 천체물리학자라 불리는 케플러였다. 그리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GTX 480/580을 살펴보면 그 개발 코드명이 바로 '페르미'이다. 페르미는 핵물리학자이고 맨해튼 프로젝트등에도 참여했으며 나같은 물리학과 학생들에게는 페르미 레벨등의 이름으로 친숙하다. 대기업 입사준비를 해본 사람이라면, 페르미 추정등의 개념을 익히며 들어 봤을 수도 있을테고.
△ 내가 사용하던 eVGA Geforce GTX480
밑도 끝도 없이 페르미가 튀어나오고 엔비디아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내가 쓰던 GTX480이 얼마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2012년도에 중고로 12만원 주고 사서 3년 가까이 아무런 말썽 없이 참 잘 써왔지만 절전기능이 잘못 만들어져서 모니터를 두 대 연결해 놓으면 항상 전력을 200W씩 퍼먹는 어처구니 없는 물건이기도 했고 저, eVGA라 로고가 쓰여진 부분에선 계란도 익힐 수 있을만큼 어마어마한 발열이 뿜어져 나오는 탓에 어지간한 케이스에 넣으면 본체 전체를 후끈하게 달궈주는 바보같은 구석도 있었다.
게임도 돌리고 CUDA로 인코딩도 해보고 여차하면 친구의 3DS Max 프로젝트를 돕는 렌더링 머신으로도 활용되던 저 그래픽카드는 내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사본 플래그쉽 그래픽카드였고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지 발싸개 같은 구석들이 너무 많았지만 반대로 성능에 대해선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리고 출시후 4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도 3DS Max용 VGA를 고르라면 여전히 가격대비 괜찮다. 중고 시세가 고작 10만원도 안하기 때문이다. 페르미보다 CUDA성능이 더 좋은 그래픽카드는 GTX Titan이나 쿼드로 계열들 밖에 없고, 그런 물건들은 본격적으로 연구비 1~2000만원씩 때려박아서 장비를 들여야 하는 연구실이 아니면 부담스러워서 살 수가 없다.
△이 아저씨가 바로 핵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난데없이 그래픽카드가 사망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라 21세기판 조침문을 쓰는 심정으로 글을 써보았다. 게임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라 그래픽카드에 큰 돈을 쓰려 하지 않던 나에게 일정 수준 이상 되는 좋은 하드웨어는 일단 갖춰놓으면 어디든 쓸데가 생긴다는 교훈을 준 고마운 물건이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묻어주고 묘비라도 하나 세워주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놈 같아서 접었고 그냥 헌정 포스팅 하나 쓰고 끝내기로 마음 먹었다. 오호통재라. 잘가라 페르미, 잘가라 GTX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