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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TB 이하 HDD는 노트북용을 구매하자 본문
노트북용 부품들의 가격이 데스크탑용 부품들 가격 보다도 싸지는 일은 아마도 없을거라 믿었다. 그런데 노트북용 램과 데스크탑용 램의 가격이 같아지고 HDD의 가격 마저도 같아지는 엉뚱한 일을 다 보게 될 줄이야. 적어도 예전엔 노트북 부품이 데스크탑용 부품보다 비싸야만 할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 3.5인치 데스크탑용 HDD는 2.5인치 노트북 HDD보다 4~5배는 크고 무겁다.
일단 노트북용 HDD들은 크기가 작았다. 안그래도 1분당 5400~7200번씩 회전하는 민감한 물건인데 크기를 줄이면서도 정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HDD는 구조상 진동이 많이 생기기에 무거울 수록 안정성이 좋다. 노트북용 HDD는 데스크탑 HDD 무게의 1/4 정도 밖에 나가지 않으면서도 정확하게 데이터를 읽고 써야만 하니 당연히 비싸질 수 밖에 없다.
두 번째로, 생산량이 달랐다. 데스크탑 PC가 잘 팔리던 시절이 있었고, 당연히 데스크탑 HDD도 매년 꽤나 많이 팔려나가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노트북은 비싸서 데스크탑 PC 대비 판매량이 많지 않았다. 적어도 5년 쯤 전까지는 말이다. 요즘은 노트북이 데스크탑 보다 더 많이 팔리는 시대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노트북에는 500GB~1TB 용량의 HDD가 들어간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 글을 쓰는 2015년 1월 기준으로 적어도 500GB와 1TB 용량에선 데스크탑/노트북 HDD의 가격이 같다. 심지어 500GB는 데스크탑 HDD가 오히려 더 비싸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단순히 노트북이 데스크탑보다 많이 팔려서가 아니다. 한 눈에 보이진 않는 다른 이유가 또 있다.
△ 모델명을 기억할 정도로 잘팔린 HDD가 몇이나 될까?
각 HDD 제조사에서 밀어주는 간판 상품은 언제나 가장 많은 양이 생산되는 플래터를 2장 집어 넣은 제품으로 정해졌다. 그 정도의 용량을 가진 제품이 제조사 입장에서는 적당히 돈이 되고 소비자들은 가격대비 가장 큰 용량을 가질 수 있었던 타협점이었기 때문이다. 1장당 320GB를 기록할 수 있는 3.5인치 플래터가 가장 많이 만들어지던 시절엔 640GB 용량의 HDD가 가장 잘 팔렸다. WD의 6400AAKS가 어마어마하게 팔려나갔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저런 논리대로라면 지금 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건 2TB HDD 여야 한다. 각 제조사의 주력 플래터는 1TB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현재 조립 PC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HDD는 1TB 용량의 데스크탑용 HDD이다.
이게 생각보다 의미가 크다. 소비자들이 더 이상은 용량에 목마르지 않다는 뜻이니까. 예전엔 더 큰 용량을 위해 소비자들이 기꺼이 돈을 썼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1TB 정도면 보통 충분하다고들 여긴다. 당연히 HDD 제조사 입장에서는 더 큰 용량의 HDD를 만들기 위해 애 쓰는 것 보다는 잘 팔리는 용량의 HDD를 조금 더 싸게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 실제로 소비자들이 사는 HDD의 평균 용량이 무어의 법칙을 따라 꾸준하게 늘어나던 시절은 끝났고, 제조사들이 더 높은 용량의 HDD를 개발하는 속도도 예전보다 많이 느려졌다.
△ 옐로와 핑크가 없다니....니들은 파워레인져도 안보고 자랐냐
'일반'소비자용 디스크 시장이 더 이상 예전처럼 팔려나가질 않으니 각 제조사들은 제품 종류를 잘게 나누어 기업 시장과 '고급'소비자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특히 Western Digital이 저 부분에서는 제일 잘 하는 편인데, Red 시리즈나 Purple 시리즈를 내놓으며 열심히 마케팅을 펼치는 중이다. Red는 RAID나 NAS 사용자 같은 고급 개인 사용자나 소규모 기업 시장용 디스크이고 Purple은 DVR같은 보안장비용 디스크다. 그리고 Red와 Purple 모두 일반 소비자용 디스크인 Blue나 Green 라인업보다 많이 비싸다. 기존의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물건들로는 더 이상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온 물건이고, 살 사람들은 어차피 살테니 비싸게 팔아도 잘 팔린다.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샜는데, 노트북 HDD가 싸진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로 노트북 HDD가 데스크탑 HDD 이상으로 많이 팔려 나가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소비자들이 더 이상 대용량 디스크를 원하지 않다보니 연구개발비가 절약되며 더 이상 데스크탑 HDD 대비 더 높은 기술력과 정밀도의 부품을 쓰면서까지 노트북 HDD를 생산할 필요가 없어져서다. 몇 년전에도 1TB 노트북 HDD는 시장에 풀려있었으니 그저 예전에 만들던 대로 조금 더 싸게 만들 방법만 찾으면 그만이라는 것. 그 와중에 노트북 HDD는 데스크탑 HDD보다 덩치가 한참 작으니 그만큼 원자재도 덜 들어간다.
단순히 값이 같으니 노트북용 HDD를 사자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다. 노트북 HDD는 대체로 데스크탑 HDD 보다 느리기 때문이다. 데스크탑 HDD는 보통 7200RPM으로 작동하지만 노트북 HDD는 5400RPM이 대부분이다. 똑같이 1TB 용량이라고 해도 데스크탑 HDD는 1장의 플래터이지만 노트북용은 2장의 플래터가 들어가고 플래터의 지름마저 작기에 전송률도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거기에 버퍼 메모리도 데스크탑 HDD가 64MB까지 증가했지만 노트북용은 여전히 8MB 전후이다. 뭐 어차피 버퍼가 8배로 늘어나봤자 실제 성능 향상은 5%도 안되겠지만. 아무튼, 노트북용 HDD는 데스크탑 HDD보다 느릴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왜 노트북 HDD를 사야 할까.
△ 이거 도대체 어느 회사 SSD일까? 그리고 얘네는 옐로랑 핑크를 내줄까?
SSD가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HDD의 속도에 신경 쓸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어차피 SSD를 쓰는 상황이라면 운영체제와 프로그램은 전부 SSD에 설치된다. HDD는 이런저런 문서나 사진이나 동영상 저장용으로 밖에 쓰이지 않는다. SSD가 달려있으면 HDD가 느리든 말든 신경쓸 이유가 없다는거다. SSD가 달린 시스템에선 15000RPM짜리 HDD를 달아도 체감성능이 달라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노트북 HDD의 장점이 더 크게 다가온다. 데스크탑 HDD는 처음 전원을 켤 때 20~25W 가량의 전력을 쓰고, 이후 가동시엔 8W 정도의 전력을 쓴다. 노트북 HDD는? 어떤 상황에서든 2.5W 넘게 쓰지 않는다. 전기를 덜 먹으니 열이 덜 나고 열이 덜 나니 팬을 달아줄 필요가 없어서 팬 소음도 없다. HDD 자체도 노트북용은 워낙 조용한데다 진동이 적어서 케이스 안에서 공진이 일어날 가능성마저 줄어든다. 데스크탑 HDD보다 자리도 덜 먹는다. 이쯤 되면, 데스크탑용 HDD를 꼭 써야만 할 이유가 없다. 적어도 HDD 1~2개에 1TB 정도 용량이면 만족하는 사용자라면 그렇다. 1
합리적으로 돈쓰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가 느려지다 보니 어느 정도의 제품을 소비자가 사야 만족스러울지 계산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대체로 예전엔 최신/최고가형 제품보다 2~3단계 정도 아래의 제품을 사면 가격대 성능비가 가장 좋다는 법칙 같은 게 있었는데 요즘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500GB 기준으로 데스크탑/노트북용 HDD의 가격이 같아진 건 오래 전에 알았지만 1TB HDD까지 이리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무튼 이번 일은 나한텐 꽤나 충격. 이젠 진짜 이 시장이 별 볼일 없어지는 게 아닐까 싶어서 겁이 난다. 하긴 이미 충분히 별 볼일 없어지긴 했지만.
- 반도체는 사용하는 전력이 고스란히 열로 바뀌지만, HDD는 전력의 거의 모두 모터를 돌리는데 사용되기에 소모전력에 비례해서 발열이 증가하진 않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