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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과 이해, 그리고 화합 본문
20살 넘어서 부터 드라마, 영화, 책, 음악, 연극 기타 등등 얕게나마 가리지 않고 문화 생활을 해왔지만 나는 건담 시리즈에 가장 많은 시간과 애착을 쏟았다.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설정 자료를 뒤적거렸고 프라모델도 많이 만들었다. 왜 하고 많은 취미들 중 건담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세상엔 재미난 일이 참으로 많은데 왜 하필 건담에만 내가 집착하는지도 생각해 봤다. 뭐, 당연한 이야기지만 건담이 주는 메시지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건담 안본 사람들을 위한 건담 영업 글이다.
건담이라는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과 주인공의 건담 모두가 그 역할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애초에 전쟁이 터졌다는 상황 자체가 평화를 외친다 한들 의미가 없는 상태라는 뜻이니까. 결국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혹은 싸움을 말리기 위해 무기를 손에 들고 만다. 평화를 위해 폭력을 휘둘러야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기 위한 도구인 건담은 본디 전쟁병기이니 싸움에 이기면 제 몫을 다 한 셈이 되겠다.
허나 피로 얼룩진 승리 보다는 다른 방향을 찾아낸 쪽이 건담 시리즈의 본래 주제와 더 잘 맞지 않겠나. 그래서 싸움에 이긴 건담이 아니라, 뭔가 독특한 업적을 이뤄낸 세 편의 건담 시리즈와 그 배경을 간단하게 써본다. 스포일러가 조금 포함되어 있겠지만, 건담 시리즈를 한 번 보고는 싶은데 너무 뭐가 많아서 손도 못대겠다 싶은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최근의 작품들이면서도 예전 건담 시리즈의 설정이나 내용을 모르고 보더라도 충분히 볼만한 작품들 위주로만 이야기 하고자 한다. 보고 나서 다른 작품들도 찾아볼 수 있다면 더 좋을테고.
기동전사 건담 UC
기동전사 건담 UC의 주제를 한 단어로 말하면 '가능성'이다. 가능성이라는 키워드는 작중에 수시로 등장하고, 등장 인물의 갈등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인류의 가능성을 믿었던 사람과 그렇지 않았던 사람의 싸움을 다룬다. 건담 UC의 주역기체인 유니콘 건담은 처음 만든 사람이 담았던 가능성을 고스란히 보여주어 결국 대량 살상병기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내며 극중에서 퇴장한다. 피를 흘려 싸워가며 얻어낸 승리 대신, 지켜내서 얻은 승리라는 것이 값지다.
△ 주역 기체인 유니콘 건담의 일러스트
기동전사 건담 UC는 총 7회의 OVA로 완결되었으며 최근 TV 방영 규격에 맞게 편집 후 기동전사 건담 UC : RE0096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방송되고 있다. TV판에 추가씬이 몇 있긴 하지만, OVA와 내용상 차이는 없다시피 하니 그냥 OVA를 보는 쪽을 권하고 싶다. 7편이고 각각 40분~1시간 정도의 분량이니 부담없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동전사 건담 00
건담 OO의 주제는 '이해'이다. 시대가 발전하고 기술이 고도화 되면서 커뮤니케이션은 더 편해졌지만 '정이 없다.' 내지는 '감수성이 예전만 못하다.'며 불편함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은 삶을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해와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오해와 싸움을 다루는 더블오의 주제의식이 난 많이 와닿는다. 건담 OO의 주인공인 세츠나 F 세이에이는 어릴 적부터 전쟁터를 전전하며 살다 마지막 순간에 무기를 놓으며 말한다. '그러니까 보여주어야 한다. 세상이 이리도 간단하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별 말이 아닌데 주제의식이 다 담겨있는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 건담 OO의 최종 주역 기체인 건담 더블오 퀀터.
건담 OO는 TV판 2시즌 각 25편씩 총 50편과 1개의 극장판으로 완결되었다. 한 편당 20분 가량이라 분량이 좀 되지만, 시간 들여가며 볼만한 가치가 있다. TV판만 보아서는 주제 의식이 뚜렷하게 와닿지 않아 좀 의아했다가 극장판에서 엄청나게 감동을 받았다. 여러모로 기존의 건담 시리즈와는 약간 결이 다른데, 메카닉 디자인이나 캐릭터 디자인 같은 부분들이 뛰어나기에 여러모로 처음 건담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권할만 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기동전사 건담 SEED C.E.73 스타게이저
건담 시드 스타게이저는 '화합'을 다룬다. 시드 스타게이저는 기동전사 건담 시드의 외전들 중 하나이다. 시드 세계관 자체가 2000년대 들어 등장한 건담 프랜차이즈 중 돈은 최고로 많이 벌었지만 욕도 최고로 많이 먹었는데, 시드 스타게이저는 시드 계열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평이 좋은 편. 그리고 작중의 주역기체인 스타게이저 건담은 굉장히 독특하게도 전투병기가 아니라 본디 무인 탐사정으로 개발된 물건이다. 비전투용 건담 주제에 어쩌다 보니 전투에 휘말려 이리저리 치이다 마지막 순간에 화합이 이뤄지는 작은 방주가 되어 두 사람을 살려내며 작품은 끝을 맺는다.
△ 주역 기체인 스타게이져 건담.
시드 세계관의 작품이라 시드 본편을 모두 본다면 조금 더 도움이 되겠지만, 무시하고 스타게이저 한 편만 보아도 괜찮다. 50분짜리 단편 OVA이기 때문에 부담없이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래 20분짜리 OVA 3편으로 나왔는데 시드 세계관 작품 전체가 블루레이화 되면서 1편으로 묶여 나왔다. 욕을 먹든 말든 시드 본편도 나는 볼만한 애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기동전사 건담 시드와 건담 시드 데스티니 모두 각각 50편짜리 TV 애니메이션 포맷이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만큼 재미는 있는 편.
마치며
써놓고 나니 세 대의 건담 모두 전투병기 치고 온전한 상태로 작품의 끝을 맞이 했다는 점이 재밌다. 당장 최초의 건담인 RX-78-2부터가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버려지며 끝을 맞이했고, 그 이후로도 사지 멀쩡한 상태로 작품의 끝을 맞이한 기체는 굉장히 드물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주인공 건담들이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장치로써 처참하게 망가진 상태로 끝을 맺는 마당에 여러 가지 이유로 종전을 맞이한 건담들이 특별히 부서지지 않았다는 점은 충분히 재밌을 일이지 않겠나.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시리즈이기도 하고, 그것 말고도 건담은 즐길 거리가 많아 참 좋은 프랜차이즈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다행스럽게도 여지껏 건담 시리즈를 제작한 감독들 중 전쟁을 좋아하거나 극우스러운 발언으로 문제를 일으킨 사례가 아직은 없다. 건담 시리즈가 기본적으로 반전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이겠지만, 뭐가 되었든 작품 외적인 부분에서 쓸데없이 신경 쓸 것이 없다는 일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러니까 많이들 봐라. 두 번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