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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시절, 안텍 솔로 II

SWEV 2016. 9. 5. 17:58

안텍이라는 PC 부품 제조사가 있다. 예전엔 케이스와 파워 서플라이 시장에서 인기 있던 업체였고, 지금은 CPU용 쿨러 시장에서 인기가 있는 편이다. 뭐 그냥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는 한물 갔다고 해도 될만한 제조사이기도 하다. PC시장, 정확히는 데스크탑 조립 PC 시장 전체가 완전히 주저 앉으면서 비싼 케이스와 파워를 잘 만들던 안텍은 이제 예전처럼 선망의 대상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에 맞추어 라인업이 축소되고 조정된 요즘의 안텍은 예전처럼 PC 하드웨어 매니아들이 열광할만한 물건을 잘 만들어내지 못한다. 특히 케이스가 그렇다. 다들 저렴한 PC를 조립하다 보니 비싼 케이스를 만들어야 할 이유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시장의 변화에 타협했다 한들 그 실력이 어디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여전히 비싼 제품도 잘 팔리는 파워 서플라이 시장에서는 안텍이 여전히 업계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PC시장이 잘 나가던 시절의 물건들은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여전히 멋지고 대단한 경우가 많다. 뭐 PC 케이스가 다 거기서 거기지 별 거 있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단언하건대, 그렇지 않다. 실물로 보면 이야기가 다르다는 말을 아무리 해도 직접 겪어보기 전까진 와닿지 않을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정상이고, 오늘 이야기 할 물건도 그것 때문에 좀 머리가 아팠다.


△ 안텍의 솔로 케이스.

안텍은 케이스 라인업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었고 그 중에서 조용하게 PC를 쓰고 싶은 사람들은 솔로 시리즈를 사면 됐다. 솔로 시리즈는 라인업 상으로는 안텍의 소나타 패밀리에 끼어있고, 소나타 패밀리는 그 이름처럼 점잖은 디자인에 전통적인 섀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고급진 PC를 만들면서도 요란한 것은 싫을 때 괜찮을 물건이다. 솔로의 유일한 약점이 길이가 긴 그래픽카드를 달아주기 어렵다는 점이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디자인을 다듬은 신형이 솔로 II라는 이름을 달고 시장에 데뷔한다. 서론이 길었다. 이 글은 솔로 II 케이스를 활용한 조립기이자 후배의 시스템 감상 정도의 글이다.


△ 안텍의 솔로 II, 심플하고 멋지다.

후배 하나가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하고 싶다고 물어왔다. 그리고 후배의 바람은 굉장히 단순했다. 컴퓨터의 소음이 시끄러우니 좀 조용하게 쓸 만한 부품들을 골라달란다. 팬을 하나씩 하나씩 멈추면서 찾아보니 VGA가 제일 시끄러웠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VGA를 교체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케이스를 교체한다는 이상한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하다보니 자꾸 판이 커져서 파워, 케이스, 마더보드, 램, 쿨러까지 갈아치웠다. 결국 제일 시끄럽던 VGA를 제외하고 모든 부품을 갈아치운 셈이 되었는데, 보통의 경우라면 시끄러운 부품부터 제거하거나 교체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정 반대의 방법을 택했던 이유가 있다.


△ 후배가 쓰는 파워컬러 라데온 R9 290, 출시 3년이 다 되었으나 여전히 고성능이다.

일단 마땅한 VGA를 찾을 수가 없었다. 후배가 쓰던 라데온 290은 출시 3년이 다 되어가는 물건인데도 충분히 최고급 수준의 성능을 뿜어내는데다 돈을 들여서 뭔가를 바꾸려면 소음 이외에도 확실한 업그레이드 요소가 있어야 했는데 290보다도 빠른 VGA들의 가격이 도무지 자비가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지포스 1070쯤은 가주어야 돈 들인 보람이 있을텐데 라데온 290을 중고로 팔면 고작 20만원 전후에 지포스 1070은 60만원에 육박하는 가격이었다. 그리고 지포스 1070은 라데온 290 대비 1.5배 정도의 성능이었는데, 3배의 돈을 들여서 1.5배의 성능과 조용함을 얻는 것은 괜찮은 주고받기라 볼 수 없다. 거기에 지포스 1070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심각하게 떨어지는 감가상각재이기까지 하다. VGA의 성능은 해가 갈수록 발전하니 말이다.


△ 솔로 II 케이스의 주요 특징.

케이스는 한 번 잘 사놓으면 그 가치가 오래 유지된다는 점도 생각해야 했다. ATX 규격의 케이스와 마더보드는 당분간 그 형태와 폼팩터를 꾸준하게 유지할테고, 그렇다면 버튼이라도 고장나지 않는 한은 케이스의 값어치가 떨어질 일은 없다. 그리고 케이스를 저소음으로 꾸민다면 다른 부품들의 소음까지 한꺼번에 잡을 수 있었다. 기존에 후배가 쓰던 케이스는 온 천지에 구멍을 송송 뚫어놓아 소음이 전부 밖으로 새어나오는 형태였기에 부품들이 내뿜는 모든 종류의 소음이 기가 막힌 앙상블을 만들곤 했다. 부품들의 발열량을 다 합쳐서 1000W쯤 되는 PC라면야 그런 케이스가 필요할 수도 있다. 허나 후배가 쓰는 부품들은 넉넉하게 500W 안쪽이면 충분했고, 500W 이내의 발열량은 후면 배기팬 하나와 최소한의 흡기 구멍만 있으면 여유롭게 식혀줄 수 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볼 때, 내가 본 최고의 마감과 품질을 가졌던 저소음 케이스인 안텍의 솔로 II를 케이스로 정해야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만원이란 가격이 쿨엔조이에서야 특별한 수준이 아니지만 4만원짜리 케이스도 비싸다고 질색하는 보통 사람한테 권해도 될만한 금액은 아니다. 심지어 국내에서는 유통이 중지되어 해외의 안텍 창고에서 가져와야 했고 굉장히 귀찮은 일인데도 안텍의 수입사인 에이원에서 컨테이너 단위로 물건을 들여올 때 한 대만 살짝 가져다 주셨다. 후배는 케이스를 기다리는 2달 내내 매일같이 징징대며 나를 들볶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조용히 주먹을 들어올렸고 스카우터[각주:1]에 뜬 내 전투력을 확인한 후배는 잽싸게 입을 닫곤 했다.


△ 섀시 가장자리의 EMI 가스켓이 너무 멋지다.

솔로 II는 요즘 보기 드물게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어졌다. 양쪽 옆판은 1T짜리 강판을 썼고, 그 안쪽에 흡음을 위해 소리를 먹는 플라스틱을 발라두었다. 그리고 섀시부는 전체적으로 0.8T 정도의 강판인데, 보통의 싼 케이스들과 다르게 굉장히 질기고 튼튼한 강판을 사용한 덕분에 어마어마하게 단단하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전자파 차폐를 위한 EMI 가스켓도 굉장히 고급스러운 방법으로 만들어 넣었고 안텍의 저소음 지향 케이스들은 전통적으로 HDD를 고정하는 실리콘 댐퍼의 품질이 좋아 HDD 소음도 잘 잡는 편이다.


말이 길었는데, 요약하자면 요즘 시대라면 나올 수 없는 물건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비싼 재료들을 아낌없이 쳐발라서 만들어낸 제품은 2016년도엔 보기 힘들다. 글의 처음 부분에 이야기 했듯 요즘 비싼 컴퓨터를 사는 사람들이 드물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게임용 PC를 만드는 것이기에 솔로처럼 얌전해 보이는 제품들은 인기가 없어서 그렇다. 결국 수입사인 에이원에서도 솔로를 단종시키고 저소음 케이스의 역할은 P100이 맡도록 브랜딩 중이다. 사실 P100은 컨셉이 좀 많이 다른데, 소비자들에게 그 차이를 설명시키기 힘들어서 포기한게 아닐까 싶다.



△ AAA 조합은 이 친구들과는 별 관계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기왕 돈을 들이는 김에 안텍에서 나온 물건들 중 최고 수준으로 꼽힐만한 것들만 채워넣고 싶었다. 안텍 케이스, 안텍 파워 서플라이, 안텍 CPU 쿨러까지 AAA 조합이다. 그 과정에서 드는 비용이야 어차피 후배 주머니에서 나오지 내가 쓰는 게 아니니까 관계 없었고-_- 나는 오로지 최고의 부품을 골라서 조립 이후의 비주얼이나 감성품질을 메이커의 워크스테이션 수준까지 끌어올리면 내 몫을 다한 셈이라고 여겼으니까. 마침 그래픽카드도 AMD GPU라 또 하나의 A가 추가됐지만 애석하게도 CPU와 마더보드는 AMD의 칩이 영 매력적이지 않아 거기까지 가진 않았다. 공대생이 폭주하면 이렇게 무섭다.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들도 주변에 공대생들이 있으면 조심하시라. 난 공대생이 아니라 다행히도 적당한 시점에서 멈출 수 있었다. 내가 없었다면 후배는 어디까지 떠내려갔을지 모른다.


박스에서 케이스를 꺼내자마자 지켜보던 후배 두명이 모두 탄성을 내질렀다. 안텍 케이스는 실물로 보아야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말에 이제서야 동의한단다. 안텍 케이스가 실물로 보아야 예쁜 건 이유가 다 있다. 재료와 가공 과정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니 어떤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만들어야 소비자가 감탄할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오는 물건들은 예전만 못하지만, 솔로 II는 안텍이 PC 시장의 황혼기에 마지막 힘을 쥐어짜 만들어낸 최고 수준의 걸작이라 할만하다. 당연히 그 감동이 클 수 밖에 없다. 후배는 두 달을 기다린 보람이 있다면서 매일 같이 케이스를 물고 빨고 있다.



△ 점잖고, 조용하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2시간 가까운 시간을 들여 아주 천천히 조립했다. 기왕 만드는 거 후배한테 제대로 된 조립의 왕도를 가르쳐주고 싶어서 케이스 각 구성부들의 역할이라든가 사소한 설계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같은 것들을 일일이 설명하고 선정리 요령도 소소하게 가르쳐 주었다. 다 만들어놓고 나니 요란하지 않은 디자인에 확실하게 조용해졌고 글을 쓰다 갑자기 온도가 궁금해져 후배에게 테스트를 시켜보니 CPU 최고온도가 60도 정도란다. 이 날씨에 이만하면 굉장히 좋은 편이다. 딱 하나 아쉬운게 VGA에서 나는 소리가 여전히 조금은 들린다는 것인데, 이건 후배한테 돈만 생기면 어떻게든 알아서 해결을 볼 문제라 그냥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지가 돈 되면 알아서 좋은 걸 사겠지 뭐.


△ 케이스가 아무리 좋아도 부품을 잘못 고르면 소용이 없다.

여담인데, 후배에게 내가 원하는대로 부품을 구해오지 않으면 조립을 저따위로 해놓겠다고 협박했다. 다행히도 후배는 일주일동안 여러 고생을 거쳐 내가 원하는 부품들을 모두 가져왔다. 한 가지 웃긴 것은 그렇게 시간과 돈을 꼴아박아서 만들어놓고 성능은 1%도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컴퓨터 주인인 후배와 조립 과정을 지켜본 단톡방의 사람들이 모두 어처구니 없어하고 있다. 뭐 최초의 목표는 돈을 들여서 조용하게 만들자와 기왕 하는 거 예쁘게 만들어보자였기 때문에 성능이 오르지 않은 것은 그럭저럭 납득이다. 페라리에서 롤스로이스로 갈아타는데 돈이 들었다고 해서 제로백이 빨라지길 기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나. 어차피 좀 있으면 후배는 CPU와 VGA 모두 바꾸겠다고 하고 있는 마당이고, 연말에 AMD의 ZEN이 나오면 AMD CPU/Chipset/VGA 세 종류로 갈아탈 예정이라 또 하나의 AAA 조합이 완성될 것 같다.


케이스 리뷰로 쓰려던 글이 아니었는데, 하다보니 분량이 커져서 애매한 글이 되었다. 케이스 리뷰라지만 케이스에 대해 살펴보거나 이야기 하는건 하나도 없고 죄다 안텍 찬양뿐이다. 뭐 어쩌다 이런 글 하나쯤 있다 한들 어떤가. 간만에 정말 맘에 드는 본체가 나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썼다. 그러니까 다들 안텍을 좀 팔아줍시다 라는게 오늘 나의 결론이다. 이 케이스의 구매와 조립 과정을 모두 지켜본 다른 후배 하나의 코멘트로 글을 마무리 한다.


  1. 그 후배는 안경을 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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