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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AMD

SWEV 2016. 8. 23. 09:17

3년쯤 전, AMD가 하와이를 내놓으며 미래 지향적인 아키텍쳐라는 말을 꺼냈을 때 모두가 비웃었다. 발전과 세대교체가 비정상적으로 빠른 GPU 시장에서 미래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처럼 여겨졌고 마침 그땐 샌디브릿지에서 아이비브릿지로 넘어가는 시기 즈음이었기에 지금처럼 CPU시장이 발전 없이 몇 년간 지지부진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AMD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3년 동안 차근차근 드라이버를 통해 성능을 올려온 하와이 계열 GPU들은 출시 당시에 비해 최대 20% 정도 성능이 올랐다. 사실 512비트나 되는 메모리 버스의 넓은 대역폭도 그렇고, 드물게 커다란 크기를 가진 칩의 크기도 그렇고 하와이의 무지막지한 잠재 성능은 예견 되어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 하와이가 이 정도로 뒷심 좋은 물건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숨겨진 잠재성능이 엄청났다는 것 말고도 하와이엔 놀라운 점이 또 있다.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들어가도 제 몫을 다한다는 점이 그렇다. AMD와 엔비디아 모두 각각 FirePro와 Quadro라는 전문가용 VGA 라인업을 따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Quadro나 FirePro는 같은 칩을 바탕으로 만든 GeForce나 Radeon에 비해 몇 배는 비싼 가격을 받는다. 실제로 그만한 가격차 만큼의 성능차이를 보여주는 편이고, 쿼드로나 파이어프로는 전문가용 프로그램에 대한 기술지원 비용도 같이 포함되어 있다. 전문가용 프로그램이라고 하니 뭐 대단한 것 같지만 어도비의 포토샵이나 오토데스크의 3D 스튜디오 맥스처럼 대학생들이 흔히 쓰는 프로그램들 이야기다. 아, 프리미어 프로도 마찬가지고.


전문가용 VGA의 성능에 관한 몇 가지 짤막한 이야기


비싼 돈을 주고 전문가용 VGA라는 물건을 들여놓으려면 이유와 명분이 필요하다. 그리고 보통 그 이유와 명분은 세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다시 바꿔 말하면 전문가용 VGA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분야에서 제 값어치를 한다는 뜻이다.범용연산,  3D 그래픽 작업, 그리고 동영상 편집 작업이다. 순서가 조금 이상할 것 같아 보이지만 이 순서대로 설명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래픽카드 혹은 VGA 카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겠지만, 화면을 출력해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부품이 예전엔 다른 이름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만약 '3D 가속 카드'라는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다면 슬슬 주변에서 아저씨 소리를 들을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3D 가속 카드라는 이름이 좀 묘한데, 예전의 그래픽 카드는 3D를 처리하기 위한 능력이 없었기에 3D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3D 가속카드라는 물건을 따로 달아주어야 했다. 한 개의 카드로 2D와 3D를 모두 그려낼 수 있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아무튼, 지금은 그래픽카드 안에 3D 가속 기능이 기본으로 딸려오게 되었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 무차별 대입법으로 오피스 파일의 암호를 푸는 성능을 측정한 결과이다. GPU가 CPU보다 수백배 빠르다.

3D 가속기능을 위해 고성능의 반도체를 만들어서 그래픽카드에 넣고 나니 이걸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래픽칩셋이 단순하지만 반복적인 작업을 굉장히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보았다. 땅을 파려면 물리학 박사 한 명 보단 고등학생 10명에게 삽을 쥐어주는 쪽이 훨씬 빠를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 안에는 저러한 단순 반복 작업이 생각보다 많이 생겨난다. 그래서 VGA의 핵심인 GPU는 게임 말고도 다른 연산작업을 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 GPU의 압도적인 단순반복연산 성능을 이용해서 게임이 아닌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일반적인 CPU처럼 계산을 시켜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이 크롬이나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통해 웹서핑을 할 때도 GPU는 소스코드를 해석해서 화면에 뿌려주는 역할을 하고, 동영상을 볼 때도 GPU가 개입해서 동영상의 화질을 향상시키거나 화면을 그려낸다. 의외로 GPU를 이용한 계산이란 개념은 대중화가 상당히 되어있어서 스마트폰에서도 요즘 흔하게 쓰인다. 그리고 GPU를 이용한 계산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관련된 규격을 만들어둔 것이 있는데 nVidia는 CUDA라는 이름의 규격을 만들어 밀고 있고, AMD나 인텔은 OpenCL이라는 이름의 규격을 만들어서 밀고 있다. CUDA와 OpenCL의 경우 온갖 프로그램에서 다 지원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자, 여기까지가 범용 연산과 관계된 이야기다.


△ GPU의 범용연산 성능을 활용하면 3D 그래픽 프로그램을 훨씬 빠르게 쓸 수 있다.

3D 그래픽 작업과 동영상 편집 작업의 경우 예전엔 CPU의 성능에 의존도가 높았다. 특히 3D 그래픽 작업을 할 때 사용자가 체감 성능을 느끼는 지점은 두 군데인데 하나는 뷰포트 성능이고 하나는 렌더링 타임이다. 여기서 뷰포트 성능은 3D로 그림을[각주:1] 그려내면서 이리저리 돌리고 확대 축소를 할 때 느껴지는 성능이다. 그리고 뷰포트 성능이 모자라면 그림을 이리저리 돌리는 것 조차도 버벅거리게 된다. 그리고 렌더링 성능은 작업을 마친 그림을 가지고 결과물을 뽑아내는 것을 이야기 하는데 단순히 저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다시 재구성하며 그려내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컴퓨터의 성능에 영향을 크게 받는 편이다. 뷰포트 성능은 VGA 성능에 의존하기에 CPU와는 큰 관계가 없었으나 렌더링 성능은 거의 전적으로 CPU의 성능에만 달려있었다. 그런데 GPU에 범용연산 기능이 추가되며 인기 있는 3D 프로그램들 대부분이 CUDA를 지원하게 되었고 렌더링 과정에서도 GPU가 개입하며 렌더링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엔비디아의 전문가용 VGA인 쿼드로는 대부분 CUDA 성능이 지포스 대비 압도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에 좋은 VGA를 쓰면 작업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동영상 편집 작업도 마찬가지로 렌더링(혹은 인코딩) 과정에서 범용연산 성능을 활용하면서 훨씬 빠르게 일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어도비의 프리미어 프로는 머큐리얼 플레이백 엔진이라는 기술을 적용시켜 CPU 성능을 많이 요구하는 대용량 동영상의 재생과 편집을 GPU쪽에서 처리하게 만들었고, 소니의 베가스나 애플의 파이널컷 계열 모두 GPU의 범용연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성능을 뽑아낸다. 특히 CUDA는 팟인코더 같은 대중적인 인코딩 프로그램에서도 지원될 정도이다.


△ 하와이의 CATIA 성능은 그야말로 놀랍다. 중고가 20만원짜리 VGA치고는 이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

이놈의 하와이가 황당한 건 몸값이 몇배나 비싼 전문가용 VGA를 성능면에서 씹어삼키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사의 전문가용 제품군인 파이어프로 조차도 어중간한 등급이면 하와이 기반의 라데온에 미치지 못한다. 팀킬도 이런 팀킬이 없다. CATIA 성능 하나만 가지고 전문가용 프로그램의 영역을 전부 논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CATIA를 쓰는 사람들이 꽤 되는 걸 감안하면[각주:2] 한국에서는 어중간한 쿼드로나 파이어프로보다 꽤 괜찮은 물건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을 벗어나더라도 CATIA는 UG NX나 CREO등과 더불어 3D CAD의 업계 표준이라 할만하고 최근엔 건축 공학용 프로그램에 연동되어 작동하는 플러그인이 개발될 정도라 활용 범위도 더욱 넓어졌다.


하와이는 290과 290X 두 모델로 나왔고 거의 3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다시 390과 390x로 리네이밍 되면서 AMD의 하이엔드 VGA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잠재력이 있는 물건을 만들어 놓고 시장에서 만년 2인자 자리에 조롱이나 당하는 일이 참으로 황당하다. 뭐 사실 하와이 정도는 애교다. 그 뒤에 쏟아져 나온 물건들에 비하면 아주 앙증맞은 수준이니까.


△ 하와이 끝판왕 295X2. 두 장의 290x를 고스란히 때려박았다.

AMD가 뭐 이런 저런 괴작을 내놓았던 일은 많았지만 아마 이만한 물건은 VGA 역사상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라데온 290X를 두 개 갖다 붙여서 만들었는데, 플래그쉽급 GPU 두 개를 한 장의 카드에 때려박는 일이야 처음이 아니었지만, 작동속도를 줄이지 않은 풀스펙의 칩을 쓴 건 저 물건이 최초이다. 만들어놓고 해놓은 인터뷰가 더 가관인데 이 친구들의 말을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니들도 좋음시롱." 결국 풀스펙 듀얼 하와이의 발열이 어마어마 하다보니 일반적인 공랭 쿨러로는 열을 식혀줄 방법이 사실상 없었고, 정신 나간 AMD는 황당한 결정을 내린다.


물 같은 걸 끼얹나?

시장에 출시된 295X2는 수랭 쿨러가 기본으로 딸려 나왔다-_-. VGA에 수랭 쿨러를 쓰는 시도야 새로울 일이 아니지만 기본 번들 쿨러로 끼워서 내보내는 일은 전혀 이야기가 다르다. 여지껏 아무도 저런 미친짓은 하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그래픽카드 제조사의 자체 커스텀이 아니라 AMD에서 직접 제시한 레퍼런스가 수랭이다. 웃긴 건 수랭 쿨러 덕분에 온도유지가 잘되어서 발열로 클럭이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요즘의 반도체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온도가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면 스스로 느리게 작동하며 열을 떨어뜨리는데, 이 현상을 쓰로틀링(Throttling)이라고 한다. 그리고 295x2는 대부분의 게임에서 쓰로틀링이 없다. 600W를 퍼먹는 VGA가 저렇다니 참 뭐라고 말하기가 난감하다. 이 친구들은 사람을 벙찌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그야말로 빅뱅이라 할만한 물건이 얼마전에 나왔다.


△ 정용진 부회장과는 별 관계가 없다.

AMD는 앞서 이야기 한 전문가용 VGA 시장에서 파이어프로라는 제품군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파이어프로 대신 '라데온 프로'라는 이름으로 라인업을 교체할 것을 발표하며 신제품을 하나 들고 나왔다. 라데온 프로 SSG. SSG는 Solid Stage Graphic의 약자다. 그리고 이름 그대로 VGA에 SSD를 달아두었다-_-.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싶은데, 원래 VGA에는 GPU가 계산할 때 쓰라고 그래픽 메모리가 달려있다. 그런데 이놈의 라데온 프로 SSG에는 거기에 1TB짜리 NVMe SSD를 더해버린 것이다. 계산에 필요한 대용량 데이터를 얹어 두라는 용도인데, 마더보드를 거치지 않고 GPU가 직접 대용량 스토리지에 엑세스 하면서 계산을 할 수 있도록 하위계층에 메모리를 하나 더 얹어두었다는 뜻이다. 생각이 너무 참신해서 발표회 자료를 찾아보고 한참을 황당해 했다.


저렇게 재밌고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놓고 사진은 개같이 찍어놨다는 점은 더 황당하다. 자세히 보면 직사각형이어야 할 그래픽카드의 사진이 왜곡되어 이상한 사다리꼴 기둥 형태로 보인다. 제조사의 공식 상품정보가 이 정도로 수준 이하인 건 좀 곤란하다. 뭔가 잘 하는데 괴상한데서 사람을 실망시킨다.


하여간 AMD를 지켜보다 보면 뭔가 좀 알 수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이놈들은 잘 하다가도 RX480 같은 물건을 내놓아서 사람을 실망시키기도 하고,[각주:3] 반대로 출시 대기중인 ZEN처럼 사람 설레게 하는 물건도 있다. 똘끼 충만한 공돌이 감성이 느껴지는 295X2 같은 물건을 내놓다가도 라데온 프로 SSG처럼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싶은 제품을 내놓기도 한다. 이건 참 묘하다. 이 정도로 행보가 일관성 없고 종잡을 수 없는 메이저급 제조사는 없다. 그래서 AMD를 보면 신기하다. 응원하고 싶다. 반쯤은 웃자고 쓴 글이다. 원래는 라데온 프로 SSG가 하도 황당해서 소개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가 이야기에 살을 붙이다보니 AMD의 각종 기행들을 소개하는 글이 되었다. 뭐가 됐든 나도 웃어가며 썼으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피식 정도는 했으면 좋겠다. 이상 끝.


  1. 정확히는 '오브젝트(Object)'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현대와 기아가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큰 자동차 제조사이고, 마침 두 회사 모두 CATIA를 기반으로 제품을 설계하다 보니 하청업체에서도 CATIA 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 된다. 아마도 인구수에 비해서 CATIA 쓰는 사람이 제일 많은 나라가 한국이 아닐까 싶을 정도. [본문으로]
  3. 경쟁사의 지포스 GTX 970과 같은 성능인 물건이 같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문제는 GTX 970은 2년 전에 출시 됐다는 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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