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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빌 언덕이 없어졌다

SWEV 2016. 9. 5. 19:37

20대 시절에 누군가 정치적 성향을 물으면 진보 성향에 가깝다고 이야기 하곤 했다. 그때는 단어 하나에 함축된 복잡한 뜻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만큼 내 생각이 깊지도 못했고, 딱히 그렇게 말하는 것이 나에게 흠결이 되던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부담없이 진보라는 단어를 꺼낼 수 있었던 시기니까. 그런데 요즘 누군가 나에게 정치 성향을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생각이 많아진다. 예전처럼 생각없이 진보라고 논하기엔 진보진영이 너무 바보같은 짓을 많이 했고, 반대로 보수라고 말하면 새누리당 처럼 보수라고 말하기 곤란한 집단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게 싫어서다. 보수는 현재의 가치를 지키려 드는데 새누리는 이제껏 쌓아온 상식을 파괴하고 나라를 후퇴시키고 있지 않나. 제 자리에 있길 바라는게 보수인데 뒤를 향해 걷고 있는 집단을 보수라고 할 순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바뀐 것이 없다.


지난 4월의 총선 전, 당원 가입을 위해 거의 한 달 가량을 고민했다. 마음은 정의당을 향해 있었지만 정의당이 가진 심각한 결점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당은 '패배하는 진보 진영'의 전형적인 사례 같았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반 새누리 진영에 숟가락 얹어가며 이득을 취할만큼 영리한 집단 같지도 않았고, 좀 추접하게 굴어서라도 자기 세력을 만들만큼 필요할 때 굽히는 법을 아는 집단 같지도 않았다. 타협이 빠진 정치는 꼭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지 않나. 그래서 민주당에 가입한 뒤 선거 때 후보는 민주당을 뽑고 비례대표는 정의당을 주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적어도 2016년 4월 13일까지는 확실히 그러했다.


그러다가 성우가 티셔츠 한 장 산 것 때문에 진보라는 진영 전체의 민낯이 드러나고 나니 나는 어디가서 진보라고 말할 자신이 없어져 버렸다. 정의당이고 한겨레고 경향신문이고 전부 엉망진창이다. '느개비후장'[각주:1]의 어디에 상식과 합리가 있겠나. 진보를 버리고 고민끝에 적당한 단어를 찾았다. 인본주의. 손석희에게 정치적 성향을 묻는 질문이 들어오면 저렇게 대답한단다. 감정적으로도 옳았고 이성적으로도 옳은 단어 같아 보였다. 그래서 누군가 나한테 정치 성향을 물으면 인본주의요 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 인본주의자라는 사람이 혐오주의를 지지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손석희가 인본주의라는 단어를 더럽히며 이젠 인본주의자라고 말할 수도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생각을 어떻게 요약해야 할지 고민중이다. '일단은 민주당 당적입니다.' 라며 어물쩡 넘어가야 하나 아니면 선민 의식과 지적 허영으로 가득차 보이는 진보를 택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새누리당을 지지한다는 오해를 감수해가면서 보수라고 말해야 하나. 나는 졸지에 비빌 언덕이 없어져 버렸다. 겨우 반년 사이에 내가 정치적, 사상적으로 기댈만한 모든 언덕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의 신념을 나타낼만한 모든 단어가 너무나도 추잡하게 더럽혀져서 울고 싶을 정도다. 이걸 도대체 어떡해야 하나. 누가 좀 가르쳐줬음 좋겠다.

  1. 메갈리안 운영자의 닉네임이다. '느그 애비 후장'의 약자 되시겠다. 난 고고한척 할 수 있을만큼 고상한 사람은 못되지만 반대로 저렇게 천박한 단어들로 내 정서를 대변할 수 있을만큼 못배운 인간도 아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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