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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존경하는 이유

SWEV 2016. 8. 20. 05:20

처음으로 몸과 마음을 모두 써가며 여자와 사랑을 나눠 본 게 스물 두 살 때의 일이다. 어지간하면 엄마한테 숨기는 일이 없는 편이지만 잠자리와 관계된 이야기는 숨겨야 할지 말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몇 달간 고민하다가 내 삶에서 중요한 변화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래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고, 결국 TV를 보던 엄마 옆에 앉아 할 수 있는 한 가장 조심스러운 단어를 골라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씀이 없으시던 엄마는 잠깐 뜸을 들인 뒤 어마어마한 대답을 들려주셨다.


"엄마, 나 이제 총각이 아니야."

"그래서?"


엄마의 반응이 너무나도 쿨해서 말문이 턱 막혔다가 간신히 한 마디 다시 꺼냈다. 그리고 또 엄청나게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다.


"아니 엄마, 내 일신상의 중요한 변화라서 엄마한텐 이야길 꼭 해야 할 것 같았어."[각주:1]

"엄한 애 마음 다치게 하지 말고 피임 잘해라."


우리 엄마의 대답은 자식의 성생활에 대해 부모가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이자 최선의 생각이었다. 이러쿵 저러쿵 쓴소리를 늘어놓지도 않으셨고 반대로 부모자식간에 뭐 그런 이야길 하냐며 피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섹스를 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 짧지만 무거운 당부 한마디만 남기신 것이다.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부모님은 정말 드물다고 생각한다. 머리로 생각해보니 합리적이라 반박할 꺼리가 없고, 가슴으로 느껴보아도 나와 나의 연인을 향한 엄마의 온기가 전해져 마음이 포근해진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너무나 감탄스럽다. 나는 저 상황에서 저렇게 의연하게, 배려 넘치는 말을 꺼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한참 뒤에 갑자기 궁금해졌다. 엄마는 내가 '아들'이고 '남자'이기 때문에 자식의 성생활에 대해 저렇게 쿨한 대답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여자였다고 해도 똑같이 쿨하게 생각하실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10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 나보다 10살 어린 여동생이 대학교에 입학하고 연애를 시작하고 그 이야기를 엄마와 나누며 해묵은 궁금증이 풀렸다.


엄마는 동생의 연애와 잠자리 문제에서도 비슷한 생각이셨다. 그리고 동생의 성별이 여자이기에 달라진 점은 딱 하나 뿐이었다. "엄한 애 인생 망쳐놓지 말라."에서 "피임만 조심하면 난 딱히 할 말이 없다." 정도로 한 발 물러서신 것이 전부다. 아직까진 대한민국에서 섹스를 하자고 덤비는 여자 보단 섹스를 하자고 덤비는 남자가 더 많을테고, 원치 않는 임신은 남자보다 여자를 훨씬 더 고단하게 만들테니 엄마가 한 발 물러서신 것은 맞는 일 같다.


원래도 엄마를 사랑했지만, 요즘엔 사랑에 존경이란 단어를 더해야 마땅하지 않겠나 싶다. 아니, 사랑과 존경 같은 단어조차도 우리 엄마 앞에서는 한없이 가볍고 모자란 단어 같다. 누구든 자식을 사랑하겠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합리적이며 옳은 말을 해줄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되겠나. 한 가지 슬픈 건, 나는 그런 부모가 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나를 알고 있다. 그래도 엄마의 발끝이라도 쫓아가기 위해 애는 쓰며 살려 한다. 그러나 하늘이 두쪽나도 우리 엄마같은 인격자는 되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이게 요즘 나를 가장 슬프게 만드는 일이다.


번외편 - 아부지의 이야기


엄마와 대화를 나눈 뒤 며칠 뒤에 TV를 보다가 러브호텔이 화면에 나왔다. 뭔가 시트콤 같은 프로그램이었는데 남녀가 모텔에 들어가서 러브체어를 보고 어머나 뭐야 세상에 하면서 민망해 하는 장면이었다. 야하다기 보단 웃기는 상황이어서 채널을 돌리지 않고 그냥 뒀는데,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엉뚱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이상하네, 저런 건 어딜 가야 있지? 난 왜 한 번도 못봤지....."


내 옆에 반쯤 누워 느긋하게 TV를 보시던 아부지는 저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시면서 나에게 물으셨다. 아부지의 격한 반응이 조금 의외였지만 이미 엄마의 쿨함에 적응한 뒤라 나는 거침없이 말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미친놈이! 너 저런 데를 누구랑 갔어?"

"여자랑? 내가 게이는 아니니까. 게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미친놈이? 거길 뭐하러 갔어!"

"때 밀러 가진 않았겠죠?"


아부지는 결국 대화를 포기하고 "저런 미친놈이..."라고 계속 중얼거리시면서 엄마가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그 뒤로 10년 가까이 나는 나와 동생의 성생활에 대해 아부지와 단 한마디도 나눈 적이 없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오늘, 나는 여전히 아부지의 입에서 나온 미친놈이란 말이 도대체 왜 나왔을지 궁금해 하고 있다. 잠자리를 가지기엔 너무 이른 나이라고 생각하셨던 걸까? 아니면 그냥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뒤 당황해서 아무 생각없이 나온 일종의 감탄사였을까. 뭐가 되었든 돌이켜보면 웃긴 일이다. 그래서 글로 옮겨둔다.


  1. 일신 같은 단어가 부모자식의 대화에 나온 일이 웃기지만,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정말 저렇게 대화가 오고 갔다. 지금 보아도 웃기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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