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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을 접해보고 느낀 점

SWEV 2016. 8. 10. 22:18

몸에서 느껴지는 이런 저런 감각들은 고스란히 살아있는데, 그걸 받아들이고 처리해야 할 운영체제가 다운되는 느낌이었다. 아주 느리게 슬로우 비디오처럼. 보통 컴퓨터가 다운되는 일은 갑작스레 벌어지기 마련이지만, 웃기게도 사람의 몸이 컴퓨터보다 훨씬 복잡하다 보니 다운되는데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는거. 뭐 컴퓨터도 달린게 많으면 켜지고 꺼지는 속도가 느려지니까 그러려니 한다.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말 자체도 느려졌고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것 처럼 뿅가고 홍콩 갈 것 같은 느낌은 한 톨도 없었다. 아무튼 생전 인연이 없을 것 같았고 별다르게 관심도 없던 마약을 아주 우연한 기회에 내 의지와 관계없이 겪었다는 것이 핵심.


지난 주 금요일인가 목요일에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한 소화불량인 줄 알았더니 결국 참지 못할 지경으로 아파서 숨을 못 쉴 정도가 되어버렸고,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에 실려갔다. 처음엔 뱃속에 가스가 찬게 아닐까 싶어 관장이나 받고 돌아올 줄 알았더니 X레이상에 별로 나타나는게 없어 아무래도 급성 위염 같다며 수액[각주:1]을 맞기 시작했는데 이 빌어먹을 수액이 듣는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은데다 고통이 갈수록 커져서 결국 마약성 진통제를 맞았다. 한참 진통제를 맞아도 고통은 줄지 않고 여전히 아픈데 정작 웃긴건 고통을 받아들이고 인지해야 하는 의식이 갈수록 흐려지더라는 것이다. 신음소리를 내며 끙끙거리던 내가 갑자기 조용해지기 시작하니까 수간호사 이모가 좀 덜아픈가보네 하고 중얼거리길래 "아픈 건 똑같은데 소리 지를 정신도 없는거에요.....생각의 속도가 느려지네요...."라고 대답했고 수간호사 이모의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제산제도 충분히 듣지 않는데다 마약성 진통제가 3시간은 가야 정상인데 40분만에 깨버리면서 다시 고통에 몸부림 치니 결국 CT촬영 강행. 지금 생각해보니까 병원에서 '마약성' 진통제라는 말을 쓰는 게 좀 의아하다. '항정신성' 진통제라면 모를까. 예전에 병원 데스크에 놓여있는 서류를 보았을때도 '마약성'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보았는데, 돌려 말하지 않는 것이 조금 의외였다.


△ CT는 위의 그림 처럼 3가지 방향의 단면을 모두 볼 수 있다.

CT를 찍으면서 조영제가 쇼크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거 맞고 죽어도 괜찮다는 동의서를 하나 썼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대충 8만명에 한 명쯤 죽는단다. 다행히도 난 해당사항이 없었고 캔에 담긴 바륨 액체를 마실 줄 알았는데 그냥 정맥주사로 조영제가 들어가는 거였고 그나마도 사람이 수동으로 넣는게 아니라 CT 촬영하는 기계에서 타이밍 맞춰서 알아서 다 넣어준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조영제가 들어간다고 안내가 나오는 순간 입부터 항문까지 소화계통이 후끈 달아오르더란 것이다. CT 촬영실이 미치게 추운 관계로 정말 돌아버릴 지경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정확히 소화기 계통만 달아오르게 만드는 조영제가 너무너무 신기해서 무슨 성분일지 한참을 궁금해했다. 더 신기했던 건 난 CT라면 위의 그림에서 초록색 방향의 단면만 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파란색 부분의 단면도 찍을 수 있더라는 것이다. 촬영된 영상을 보는데 위의 그림에서 Coronal plane이라고 쓰여있는 단면을 직접 보면서 의사가 설명해주길 십이지장이 부어 있단다. 결국 급성 위염이 아니라 급성 십이지장염이었다. CT를 다 찍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아픔이 많이 가셔서 입원실로 올라갔고 큰 어려움 없이 잠들었다.


△ CT의 원리와 관계 있는 그림. 오른쪽의 네모난 블럭 한 조각을 복셀(Voxel)이라고 부른다.

다음날 아침에 눈뜨고 CT가 너무 신기해서 원리를 찾아보니 생각보다 별 물건이 아니었다. 사람의 몸을 블럭 조각처럼 자그마한 구획, 그러니까 복셀로 나눈 뒤 복셀마다 X레이를 쏘아서 나중에 컴퓨터로 합성하는 원리였다. CT 기계가 대체로 동그랗게 생긴 이유는 회전하면서 여러 각도로 X레이를 쏘기 위함이었고. 내친김에 MRI의 원리도 자세히 찾아볼까 했으나 담당 주치의님의 회진시간이 다가와서 그냥 까먹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배를 만져서 이리저리 진단 해보시고는 일단 어느정도 안정된 듯 하니 점심 때 죽 한그릇 먹어보고 괜찮으면 집에 가라셨다. 그리고 죽 먹고 별 탈 없길래 집에 왔다.


병원비를 결제하면서 두 가지 정도를 다시 알게 되었다. 첫 번째가 대한민국의 건강보험 제도는 대단히 위대하다는 점이고, 두 번째가 119 구급차는 경우에 따라선 무료라는 점이다. 나는 시 경계를 넘지 않았고 병원 소속이 아니라 소방서 소속의 구급차를 탑승했기에 별도의 구급차 출동비가 청구되지 않았다. 하룻밤 내내 몇 리터나 되는 수액과 마약을 맞은 것 치고는 병원비가 소박하게 나와서 다행이었고 그나마도 실비보험을 따로 들어놓은 덕분에 결국 내 주머니에서 나간 건 한 푼도 없다. 그런 의미로다가 한국은 의료 선진국이 맞는 것 같다-_-.


늘상 그렇듯이 글의 제목은 낚시고 마약을 다시 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운영체제가 서서히 다운되는 느낌이라니 끔찍하기 이를데가 없다.

  1. 아마도 제산제. 저걸 맞기 시작했을 땐 고통에 몸부림 치느라 설명이 귀에 하나도 안들어왔고 저걸 다 맞을 때 쯤엔 마약성 진통제에 취해있어서 무슨 약인지 알아볼 상태가 아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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