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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이유 본문
대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첫키스를 나눈 여자 였고, 성적으로 흥분을 느낀 첫 상대였다. 온 하루를 같이 보내고 3주 쯤 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채여있었다.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을 오토바이 타고 가다 보아야 했다. 우울증이 있는 그 친구는 엉뚱하고 황당하게 나를 바보로 만들었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이해하려 애를 썼다. 어릴 적 아무 생각 없이 개구리를 괴롭히던 나의 모습과 비슷할 뿐이라며 합리화 했다. 사람으로서 느껴야 할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친구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본인의 노력이나 의지로 어찌 될 문제가 아니었던 걸 나도 알고 있다.
컴퓨터를 고쳐주다 두 번째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응석 부리는 나를 잘 받아주었지만 입이 짧고 매사에 예측이 안되었던 친구였다. 연애에 쑥맥이었던 나도 나였지만 그녀의 대책없음과 자유분방함 사이 어드메쯤인 성격도 한 몫 했다. 한 번의 헤어짐, 그리고 1년 뒤에 다시 온 연락. 이젠 조금은 스스로의 마음에 책임을 질 줄 알지 않을까 싶어 여러 말 않고 받아주었다. 군대를 갈 때 까지만 해도 애틋했지만, 입대 이후 3주만에 연락이 끊겼다. 아무런 통보도 없는 이별은 두 번째였다. 두 번 겪는다 한들 비참함이 덜어지거나 익숙해질만한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길에서 우연히 만나더라도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아무때고 기분따라 내쳐버릴 수 있는 사람과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보내도 마음이 온전히 닿지 못할 것을 나는 안다.
컴퓨터를 팔다가 집 앞에서 여자친구를 만들었다. 그 아이는 남친이 있었고 우리 둘은 그 남자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는 사이었다. 똑똑하고 예쁜 친구였지만, 몰래 만나는 게 몸도 마음도 편치 않았다. 결국 흐지부지 헤어졌다.
백일 휴가를 나가 고백한 친구는 네 번째 여자친구가 되어 주었다. 해준 게 없이 그저 내 욕심만 채우기 바빴다. 내 몸과 마음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그 아이를 이용했다. 미안했다. 지금도 사과하고 싶지만 연락할 엄두도 안나고 연락할 방법마저 마땅치 않다. 우연히 만난다면 정말 미안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 친구는 내가 자신이 만난 남자들 중 최악은 아니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시간이 꽤나 흐른 지금도 죄책감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다. 죄책감은 들지만 다시 만날 생각은 없다. 서로 끌리는 부분이 없었단 것을 지금은 둘 다 알고 있다.
군대를 다녀왔다. 지금 돌아보면 엉망이었지만 당시엔 큰 숙제 하나 해결한 기분에 자신감이 넘쳐 뭘 해도 될 것 같았다. 나한테 과분한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고 고맙게도 받아주었다.
같이 바다를 보러 갔었다. 여름이지만 유람선 위엔 바람이 차가웠고, 나는 그럴 때를 대비해 챙겨간 바람막이를 꺼내 입혀주었다. 서툴렀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었고, 설렘이 가득하며 모든 것이 즐거웠다. 700원짜리 아이스크림 두 개와 이마트 장난감 코너만 있으면 우리는 몇 시간이고 즐거울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싸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시덥잖은 다툼이었지만 둘 다 스스로를 굽혀야 할 때를 알지 못했고, 헤어졌다. 결국엔 헤어졌지만, 처음으로 납득이 가는 이별이었다. 온 마음이 서로 부딪쳐 깨져가며 맞이한 첫 번째 이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게 당신이 그리운 가장 큰 이유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당신이 그리운 건, 저 이유가 제일 크다. 당신이 아름다웠던 것도, 당신이 놀라우리만치 머리가 좋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이별에 예의를 지켰고 이별 다운 이별을 한 첫 상대가 당신이었다는게 훨씬 더 크다. 일방적 통보나 잠수가 아니라 서로 정말 죽일듯이 싸워서 끝장이 난 첫 번째 상대였다 당신은.
당신 이후에도 나는 어처구니 없는 일방적 통보를 한 번 더 겪었다. 2년 간 사귄 여자친구의 카톡을 통한 이별 통보에 벙쪘고 카톡에 새로운 남친 사진을 잘도 걸어놓는 것을 보며 황당해 했다. 2년이란 세월의 무게마저도 이별에 예의를 갖추길 요구하기엔 그 사람에게 충분히 길지 않았던 모양이다. 헤어지기 1주일 전, 이야기 할만한 충분한 시간과 분위기가 갖춰졌을때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다가 갑작스레 집어던지듯 이별통보를 해왔다. 두 번째 여자친구와 마찬가지로, 마주쳐도 별로 반가워 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래서 당신이 더 특별하다. 겨우 3개월의 짧은 기간동안 당신은 그 자신감과 불같은 성격으로 나를 수도 없이 지치게 만들었지만 적어도 이별에서 만큼은 철저히 예의를 지키려 애썼다. 제대로 찾아와 말을 꺼내고 슬퍼하진 않았지만 일방적인 통보로 마무리 지으려 들지도 않았다. 마음이 서로 충돌하며 깨지는 편을 택했다. 서로의 감정을 달래주기엔 미숙했지만, 적어도 비겁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끝까지 당당했다.
나는 그래서 지금도 서서히 나를 다듬으며 당신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린다.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섣불리 연락하지 않고 있다.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다. 오직 나만을 기다려주지 않아도 괜찮다. 당신이 만난 남자들 중 내가 제일이 아니었다고 해도 나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저 옆자리만 비어 있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