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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이 반가웠던 어느 날

SWEV 2017. 1. 21. 08:38

마더보드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아는 사람 중에서 아수스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부동의 세계 1위 마더보드 제조사이기도 하고 마더보드 외에도 스마트폰과 공유기 혹은 노트북처럼 개인 소비자용 각종 IT기기를 많이, 그리고 잘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마더보드 말고도 이곳 저곳에서 아수스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건실한 제조 마인드를 가진 회사가 이것 저것 많이 찍어내고 그 제품들이 실제로 괜찮기까지 하다면 소비자들 입장에서 손해 볼 구석이 뭐가 있겠는가. 실제로 아수스는 시장의 선두주자로서 편하게 주저앉아 장사하지 않고 여러가지 재밌는 물건을 만들어내곤 했는데 요즘 본 것중에 제일 충격적인 것은 외장형 수랭 쿨러가 달린 노트북이었다.[각주:1]


△ 아수스가 잘 알려져있지 않다보니 이런 웃기는 짤도 나왔다.[각주:2]

아수스가 만들었다는 물건은 공유기든 노트북이든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지만 뭐가 되었든 나처럼 오래된 컴덕후 입장에서 아수스는 마더보드 제조사이고, 내가 지금 쓰는 마더보드도 아수스고 앞으로 쓸 마더보드도 아수스일 것이다. 그리고 아수스 마더보드를 오래 보아온 입장에서 굉장히 뜬금없을 물건이 엊그저께 다나와에 떴다. 뭔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고, 사진이 잘못 올라온 것이 아닌가 싶어 아수스 글로벌 홈페이지도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다나와도, 내 눈도 이상이 없었다.


△ 아수스의 B250M-C 마더보드.

아수스가 초록색 마더보드를 내놓았다. 인텔도 아니고, 슈퍼마이크로도 아니고, 타이얀[각주:3]도 아니고 그 아수스가 초록색 마더보드를 내놓았단 말이다. 다른 제조사가 그러면 그런가보다 하는데 아수스는 좀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실 아수스가 초록색 마더보드를 만든 것은 처음이 아니다. 오래전에 서버용 마더보드를 만들면서 초록색 기판을 쓴 일이 있긴 있었다. 그런데 개인 소비자용으로 만든 물건도 아니었거니와, 인텔의 기업용 CPU인 Xeon CPU 마더보드 시장에서 아수스는 입지가 굉장히 좁기에 일종의 코스프레 정도로 볼 수 밖에 없었다. 보통 기업시장용 마더보드들이 초록색 기판을 쓰기에 시장의 다른 경쟁자[각주:4]들을 관례처럼 따라간 것 뿐이라는 뜻이다.


△ 아수스의 황소고집이 보이는 갈색 마더보드. CUSL2-C라는 펜티엄 3용 제품이다.

드물게 나오는 저런 코스프레를 빼면 아수스는 '원래' 초록색 기판을 지독히도 안쓰던 회사이다. 다른 제조사들이 초록색,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 심지어 흰색까지 온갖 색깔을 기판에 칠하는 와중에도 아수스는 심지굳게 황갈색 기판을 고집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판 색깔과 성능은 아무 관계가 없고 예나 지금이나 공돌이 집단인 아수스는 제품 외형에 도무지 관심이 없다보니 성능만 좋으면 그만이란 생각으로 그랬지 싶다. 이 황갈색 기판은 PC매니아들 사이에서도 똥색 기판이라며 좋은 소리를 못들었는데, 기판 색상에 대한 고집이 어느 정도냐면 아수스가 검정색 기판 마더보드를 처음 내놓았을 때, 그 제품을 고급진 상자에 담아 별명까지 붙여주며 따로 내놓았을 정도이다.


△ 오죽했으면 아수스가 검정 마더보드를 내놓은게 PC 유저들의 화젯거리가 되었겠는가.

아무튼간에 아수스가 초록색 PCB를 어지간해서는 쓰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검정 PCB 마더보드를 내놓은 일이 뉴스에 날만큼 아수스는 뭔가 제품을 꾸며내는 일에 별 취미가 없던 제조사였고[각주:5] 그러다보니 어쩌다가 초록색 마더보드를 내는 일 자체가 PC 하드웨어 매니아 입장에서는 굉장히 보기 드문 일로 느껴진다는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 되시겠다.


△  모델명의 B250M-C 중에서 C는 아마도 Commercial이 아닐까.

다시 주인공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B250M-C는 엄밀히 말하면 소비자용 제품이 아니다. 소비자용 제품은 B250M-A라고 따로 나와있고 B250M-C는 기업용에 준하는 설계가 보인다. PCI 슬롯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인데, 요즘 PCI 슬롯을 쓰는 소비자용 확장 카드는 있지도 않다. 구형 사운드카드나 쓰는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이미 낡고 느려진 PCI슬롯을 따로 써야만 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B250M-A는 아예 그 부분을 잘라내서 세로 크기가 조금 작아졌는데 B250M-C는 구형 PCI 확장 카드를 써야만 하는 장비들을 위해 굳이 일부러 달아두었다.


증거는 PCI 슬롯 뿐만이 아니다. 내장 LAN이 인텔 제품이다. 소비자용 B250M-A의 경우 적당히 리얼텍 칩셋을 달아두었지만, 산업용이나 워크스테이션용 마더보드로 쓰기에 리얼텍은 이미지가 썩 좋은 회사도 아닐뿐더러, 실제로 벼락을 맞거나 순간적으로 서지[각주:6]가 흐르거나 정전기 등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잘 죽는 편이기도 하다. 결국 신뢰도 차원에서 인텔의 i219V NIC[각주:7]가 달려있다. S-ATA 포트도 요즘 추세처럼 ㄱ자로 마더보드와 평행하게 케이블이 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수직하게 커넥터가 삽입되는 방식이고, 그나마도 각 포트들끼리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산업용 PC 케이스들은 안쪽 공간이 넉넉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보기 좋은 선정리 보다는 유지보수가 편한 쪽이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다. 특히 2개씩 짝을 지어 위아래로 겹쳐있는 S-ATA포트의 경우 아랫쪽 포트의 케이블을 뽑기 위해 윗쪽 S-ATA 커넥터도 뽑아내야 하는 일을 겪어보았다면 이게 왜 기업용 특성에 가까운지 대번에 이해가 갈 것이다.


mATX 폼팩터를 꽉 채워서 만들어진 기판 사이즈 같은 것도 기업용 시장을 노려서 만들어진 구석이다. 개인 소비자들이 쓰는 마더보드야 나사 구멍이 몇개가 뚫려있든 대충 고정만 되면 소비자들이 딱히 신경 쓰지 않는 편이지만 산업용 케이스나 워크스테이션 마더보드의 경우 나사 구멍 위치와 크기까지 모두 엄격하게 딱딱 지켜주길 바라는 소비자들이 많고 실제로 나사 구멍을 통해 케이스와의 접지가 이뤄지기에 이건 의미없는 고집이 아니다. 이복형제인 B250M-A에서는 기판의 가로폭 세로폭 모두를 줄여서 원가절감과 소모전력 최소화를 우선으로 설계했는데, B250M-C는 전기적 안정성과 물리적 고정을 더 우선시하여 mATX 폼팩터인 9.6 x 9.6인치 크기를 고스란히 지키고 나사구멍도 다 레퍼런스에 맞게 뚫어두었다. 아무튼 요즘 보기 드물게 레퍼런스를 지키고 신뢰도를 끌어올리는 일에 최우선 가치를 두었다는 것이 군데 군데 보여서 흥미롭다.


△ 좋은 제품을 봤다면, 제품의 컨셉을 반영한 견적을 짜주는게 예의.

말이 나온김에 또 재미삼아 견적을 짰다. 컨셉은 엔트리레벨의 그래픽용 워크스테이션 정도고, 초록색 옷을 뒤집어쓴 마더보드를 배려해서 각종 부품들도 죄다 초록기판에 회색 철판이 고스란히 노출된 케이스로 골랐다. 사실 원래 케이스는 철판에 따로 색이 입혀지지 않은 것이 더 고급이기 때문에[각주:8] 메이커에서 만들어내는 PC들은 대부분 철판에 따로 색칠을 하지 않는데, 이런 류의 견적은 메이커 PC를 따라가는 것이 정답이라는 점을 알아주길. 대충 델의 프리씨전 3420 SFF 워크스테이션이나 HP의 Z240 SFF 워크스테이션 정도를 노리고 있다면 이 쪽이 가격대비 성능이 조금 더 나을 가능성이 있다.


고집 있는 아수스 덕분에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피식한 결과가 이 쓸모없는 글이다. 자꾸 옛날 이야기를 하려 드는 것을 보면 나도 아저씨가 다 되었나보다. 날이 춥다. 때늦은 겨울 날씨에 감기조심들 하시라.

  1. 스카이레이크 시절에 나온 물건이 캐비레이크가 나오면서 버전업 되어 다시 등장했다. 뭐가 되었든 노트북과 수랭은 간부 불침번이나 가톨릭대 목탁 제조학과처럼 단어의 조합이 묘하다. [본문으로]
  2. 비번을 모르는것과 자기가 산 노트북의 브랜드도 모른다는 것을 보고 훔친 노트북이 아니냐는 의혹이 좀 있었다. 진실은 나도 모른다. [본문으로]
  3. 인텔, 슈퍼마이크로, 타이얀 모두 개인 소비자용 마더보드는 만들지 않고 기업용 제품군만 만든다. 즉 서버나 워크스테이션, 혹은 산업용 마더보드만 만들기 때문에 아수스랑은 약간 노는 물이 다른 회사이다. 그리고 저 물에서는 보통 초록색 기판을 써주는 관례가 있다. [본문으로]
  4. 위에서 말한 인텔, 슈퍼마이크로, 타이얀 등등. 뭐 그 외에도 DFI 정도가 있겠다. [본문으로]
  5. 지금은 전혀 아니다. RoG라는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시켰고 지금은 다른 제조사들도 아수스처럼 게이밍 브랜드를 꾸려내기 위해 애쓰는 중. 기가바이트가 AUROS라는 브랜드를 내놓으며 열심히 따라하고 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본문으로]
  6. Surge, 전기장치에 여러가지 이유로 순간적인 과전류가 흐르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본문으로]
  7. 흔히들 랜카드(LAN Card)라고 하지만 정확한 명칭은 NIC(Network Interface Card)의 약자이다. [본문으로]
  8. 민낯이 예쁜 여자가 물광 메이크업으로 화장을 가볍게 끝내는 것과 같다. 철판 재질 자체에 자신이 있으니 두꺼운 색칠로 결점을 가리지 않을 수 있는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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