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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젠으로 보는 PC시장의 온도 차이

SWEV 2017. 2. 18. 04:22

라이젠 소식으로 간만에 PC 커뮤니티가 좀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라이젠이란 물건에 대한 사람들의 온도차이가 명확한 것이 내 눈엔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아서 옛날 이야기 좀 곁들어서 설명을 해볼까 싶다. 언제나처럼 가벼운 글이 되겠지만, 꽤 오래 전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에 조금 지루할지도 모른다. 아무렴 어떠랴. 하루에 100명 오는 블로그에 지루한 글 하나쯤 쓰는 것도 나쁠 것이 없다. 쓰는 내가 즐거우면 그만이니까.


△ 모든 것의 시작, AMD64

x64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 x64의 원래 이름은 x86-64였다. 이름 그대로 x86의 기본적인 아키텍쳐를 가져오면서 64비트 연산이 가능한 상위 호환의 개념이었고, 지금은 AMD와 인텔 CPU 모두가 쓰고 있는 기술이지만 이 아키텍쳐를 처음 만든 곳은 의외로 AMD이다. 그렇기에 x86-64의 또 다른 이름 중 하나는 AMD64이고, 이 AMD64는 x86-64의 이름이 입에 잘 붙지 않다보니 나중에 AMD가 새로 붙인 이름이다.


△ AMD64로 만들어진 첫 번째 CPU, 애슬론 64 시리즈

AMD64는 PC시장에 굉장히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일단 AMD64 덕분에 64비트 운영체제가 더 빨리 퍼질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64비트 운영체제를 아무렇지 않게 깔아쓰고 있는 것은 순전히 AMD의 공이라고 보아도 좋다. 원래 인텔의 계획대로라면 64비트의 도입이 훨씬 나중의 일이었고, 그나마도 32비트 프로그램과의 완전한 호환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에뮬레이터를 써야 해서 성능상의 한계가 많았다. 오래된 프로그램도 많이 돌려야 하는 윈도 환경[각주:1]을 고려할 때, 32비트 프로그램들과의 완벽한 호환을 보장하는 AMD64는 우리가 굉장히 속편하게 컴퓨터를 쓸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기술이다.


64비트 지원 문제가 아니더라도 애슬론 64는 굉장히 잘 만들어진 CPU였다. 그때 당시 인텔은 지금도 프레스핫이라는 이름으로 놀림받는 프레스캇 CPU를 내놓으며 한창 삽질중이었는데, 애슬론 64는 메모리 컨트롤러를 CPU에 통합시키면서 전체적인 성능이 인텔 제품보다 훨씬 좋았다. 단순히 성능이 좋기만 해도 살만한 CPU가 되는 마당에 AMD의 제품은 조금 더 미래지향적이기까지 했다. 지금 당장은 호환성을 위해 32비트 운영체제를 깔아서 쓰겠지만 나중에 64비트 시대가 왔을 때 아무런 하드웨어 업그레이드 없이도 새로운 운영체제를 설치할수 있는데다 32비트 OS의 한계인 메모리 4GB 문제도 사라지고, 지금의 32비트 운영체제 대비 속도도 더 빨라진다고 하니 누가 AMD64를 싫어할 수 있었겠는가. AMD64가 시장에 등장하며 생긴 이런 저런 일들 중 개인 소비자한테 끼친 영향만 보아도 이렇다.


△ AMD의 기업용 CPU인 Opteron, 인텔의 Xeon에 대응하는 라인업이다.

기업 시장에서는 AMD64의 영향이 더 컸다. 서버용인 Opteron은 인텔에게 훨씬 더 큰 치명타를 안겨주는데, 일단 애슬론 64의 등장 당시에 램을 4GB씩이나 쓰는 개인 소비자는 사실상 없었다. 그러나 메모리를 많이 써야 하는 서버에서는 64비트 운영체제에 목이 말라있었고 언제든 아무런 추가비용이나 업그레이드 없이 64비트로 넘어갈 수 있는 옵테론이 굉장히 좋은 선택이 되었다. 메모리 용량 말고도 옵테론은 제온보다 기술적으로 나은 점이 굉장히 많았다. 당시의 인텔 CPU는 메모리 컨트롤러가 아직 마더보드에 있었기에 CPU를 여러 개 쓰는 상황[각주:2]에서 메모리 성능 저하가 심각했다. 그런데 애슬론 64와 옵테론에 사용된 Hyper Transport라는 기술은 이런 제약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인텔의 Xeon이 메모리 성능 문제로 죽을 쑤던 4소켓 CPU 이상의 Enterprise급 초대형 서버에도 무리없이 안착한다.


개인 소비자와 기업 시장 양쪽에서 정신없이 두들겨맞던 인텔은 새로운 데스크탑/서버용 아키텍쳐를 만드느라 바쁜 나머지 모바일 시장을 개척하는데 실패한다. 미래를 준비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개인용 시장에서야 그렇다지만 기업용 시장에서까지 매출이 꺾인 인텔 입장에서 당장 돈을 버는데 필요한 것 말고는 앞을 내다볼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실패가 오늘날의 ARM을 만들어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같은 제품들에 들어갈만한 CPU 라인업을 미리 짜놓았다면 지금의 모바일 하드웨어 시장은 굉장히 많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러한 PC 하드웨어 시장이 변화하는 과정과 역사를 실시간으로 겪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PC를 만진지 15년 넘은 아재 컴덕들이라면 이 오래된 기억들이 참으로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PC를 만져본 경험이 길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AMD는 윈도가 깔리는 CPU를 만들 수 있는 한참 모자란 2위 업체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라이젠에 대해 소비자들 사이의 온도 차이가 나는 이유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AMD가 인텔을 엿먹였던 과거를 모르고 AMD가 시장에 끼친 거대한 영향을 라이브로 겪어본 일이 없으니 AMD란 쩌리업체가 빅뱅을 일으킬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뜻이다. 실제로 AMD는 최근엔 퓨리와 폴라리스를 기대치만 못하게 만들어내면서 욕을 먹었고 조금 더 예전으로 되돌아가도 애슬론64의 후속 제품인 페넘과 FX를 연달아 말아먹으면서 CPU 시장에서도 설 자리를 빠르게 잃어갔다. 이런 업체에 뭘 기대하겠나. 까보기 전까지는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실로 오랜만에 등판한 AMD의 구원투수, 라이젠

허나 암레발은 없다. 라이젠의 성능은 뛰어날 것이다. 아니, 이렇게 예측하듯이 말 할 필요도 못느낀다. 그냥 뛰어나다. 정말 간만에 AMD가 인텔을 상대로 빅뱅펀치를 날린 셈이다. 인텔이 대응 라인업을 준비중이긴 하지만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보급형 CPU부터 고가형 CPU까지 라이젠은 인텔의 펜티엄 듀얼코어를 제외한 모든 포트폴리오를 무너뜨릴 정도의 경쟁력이 있다. 작년 늦가을 쯤부터 고성능의 비싼 PC를 사려는 사람들을 말린 나의 선택은 다행히도 옳았다. 당신도 내일 당장 써야 할 PC가 필요한 게 아니라면, 좀 기다리는게 나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 이렇게 널리 퍼질 줄 알았으면 좀 더 성의있게 만들걸....

심심해서 라이젠 합성짤을 하나 만들었더니 여기저기에 퍼지고 있다. 내가 만든 병신같은 짤들이 널리 퍼지는 일은 간만이라 나도 기분이 좋다. 아 빨리 보도관제가 풀렸으면 좋겠다. 흥분된다. 누구 한 명 잡아서 컴퓨터 사게 풀무질 좀 한담에 내 기준에서의 드림PC를 만들면서 대리만족할 생각을 하니 엔돌핀이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쏟아진다. 그러니까 당신도 기대하시라. 그리고 긴장하시라. 내가 누구한테 뽐뿌를 넣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1. 그런게 어딨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PC방에 아직도 스타크래프트 1을 돌리기 위해 윈도 7이 깔려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본문으로]
  2. 다시 말해, 마더보드 하나에 2개 이상의 물리적 CPU를 쓰는 상황. 그때 당시엔 멀티코어라는 개념 조차도 없어서 서버쪽은 2개 이상의 CPU 소켓을 달고 나오는 경우가 흔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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