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V

애플의 절치부심 - 새 맥 프로와 프로 디스플레이 XDR 본문

컴터

애플의 절치부심 - 새 맥 프로와 프로 디스플레이 XDR

SWEV 2019. 6. 4. 05:53

 

애플 안티 주제에 이런 글을 왜 쓰나

며칠전에 WWDC 2019에서 애플이 신제품을 몇 내놓았다. iOS13인가 뭐 아무튼 새 OS도 나왔다고 하고, 멀티태스킹을 강화한 아이패드 전용 OS도 나왔다고 하는데 애플 기계들 사서 쓸 생각도 필요도 돈도 없는 내가 글을 쓸 자격은 없는 것 같다. 나 말고도 그런 이야기는 사람들이 알아서들 써주겠지. 모바일쪽이야 내 관심사 밖이지만, 신형 맥 프로와 모니터는 굉장한 부분들이 많아서 이걸로만 글 하나는 나올 것 같았다. 이야기 하는 김에 기존 원통형 맥 프로가 얼마나 문제인지 시원하게 비판하고 싶었다. 나를 오프라인에서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애플을 극혐하는 것을 알기에 애플 신제품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다니 욕하려고 글쓰냐는 질문을 해댔다. 매 번 하는 이야기지만, 맘에 들면 칭찬하고 맘에 안들면 깔 뿐이다.

 

 

2013 맥 프로의 실패 - 자리를 보고 누워야 한다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애플이 2013년에 발표한 원통형 맥 프로는 놀라우리만치 작은 덩치에 대단한 성능을 욱여넣고[각주:1] 매끈한 디자인으로 마무리 된 재미난 물건이었다. 출시 당시 독특한 냉각 구조 또한 화제가 됐는데, 하단에서 빨아올린 공기로 부품들을 식혀준 뒤 뜨거워진 공기는 굴뚝처럼 수직으로 뽑아내는 형태였다. 방열판의 냉각 용량과 공기 방향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온도 문제가 있을거란 생각이었는데, 여지없이 이 맥 프로는 100도씨에 달하는 높은 CPU 온도와 시간이 지나며 터져나오는 냉땜 문제 등등 명백히 설계상 결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결국 애플이 소비자한테 사과하는 일 까지 생겼다.

 

쿨링 구조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맥 프로는 문자 그대로 워크스테이션인데 이쪽 시장에서는 사용자의 유지보수가 불가능하다는 점과 확장카드를 꽃기 위한 공간이 전혀 없다는 점이 굉장히 치명적이다. 일을 하다 장비가 망가지는 일은 흔한데, 이 때 어디가 망가졌는지 확인해보는 것 조차 불가능하면 그 짜증과 시간은 누가 보상해주겠나. 똑같은 장비를 여분으로 하나 더 들여놓는다면 모를까, AS센터까지 들고가서 처리되는 기간 내내 손을 놓아야만 하는 상황이 와버리는 것이다. 거기에 애플의 AS기간은 대단히 길고 불친절하기로 유명하기까지 하다. 경쟁사의 제품들은 사무실에 앉아 전화 한 통 하면 AS기사가 출장와서 예비 부품을 끼워보고 수리해주는 서비스까지 제공하는데[각주:2] 서비스센터로 들고 가서 얼마가 걸릴지도 모른다니 문제가 결코 가볍지 않다.

 

요즘처럼 마더보드와 CPU에 기능이 많아 확장카드 쓸 일이 없는 시대에 확장 카드가 없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으나, 맥 프로가 쓰일 정도의 스튜디오 규모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000만원을 호가하는 맥 프로를 써서 작업 시간을 줄여야만 할 정도라면 스토리지 성능에도 대단히 민감한데, 원통형 맥 프로는 확장카드 슬롯이 없다보니 SAN을 위한 전용 인터페이스 카드를 쓸 방법이 없었다. 일단 SAN이 뭔지 가볍게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SAN이란?

△ NAS와 SAN의 토폴로지 차이

SAN이 NAS를 뒤집어놓은 아나그램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사실 내 이야기) 설명하고 들어가고자 한다. 사실 SAN과 NAS는 적어도 구성하는 하드웨어들의 특성만 놓고 보면 큰 차이가 없다. 얼핏 보면 역할도 비슷하다. 여러 사람이 접속해서 쓰는 공용 저장장치라는 개념 자체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저장장치를 외장 유닛으로 만든 다음, 거기에 네트워크 기능을 넣는 방식이니 하드웨어의 구성 자체만 놓고 보면 별 차이가 없다. 실제로 고성능 NAS와 SAN은 겉으로 보기엔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로 쓰이는 역할은 전혀 다르다.

위의 그림에서 SAN은 전용 스위치[각주:3]를 통해 '여러 스토리지 장비를 하나의 스토리지 군(Storage Area)으로 묶어' 각 PC에 제공하는 형태이고 NAS는 인터넷에 연결된 독립장비의 형태인 것이 보일 것이다. 일단 네트워크의 구성 형태만 놓고 보면 저 그림도 옳지만, 설명을 좀 추가해보면 아래와 같다.
 
NAS는 보통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구성한 네트워크 내부의 PC 백업과 공용 스토리지를 제공하는 것 외에도, 해당 네트워크를 벗어난 외부에서의 접속을 위해 만들어져 있다. 사무실 와이파이를 쓰지 않는 상황에서 스마트폰의 LTE 통신 기능을 이용해서 사무실 밖에서도 데이터를 쓴다든가, 아니면 카페에 나가 사무실에 있는 데이터를 뽑아서 쓰는 형식이다. 이 과정에서 공개된 인터넷 망을 이용하여 데이터를 주고받게 된다. 데이터가 오가는 포트도 이더넷 포트(RJ-45, 흔히 랜선을 꽃는 포트)이다. 보통 1Gbps~4Gbps 정도의 속도를 보여주고 드물게 고가모델에 한해서는 10Gbps 속도도 볼 수 있다.

반면 SAN은 철저히 네트워크 내부망을 위한 장비이다. 사무실 내부의 PC들과 고속으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일에만 집중해서 설계된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NAS에 비해 처리속도가 대단히 빠르며 더 높은 신뢰도를 보장한다. SAN은 외부 대역폭 속도가 기본 10Gbps부터 시작이고 40Gbps 이상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같은 10Gbps라고 해도 고성능 NAS의 10Gbps와는 성능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NAS의 10Gbps 속도는 이더넷 인터페이스를 이용하기에 각종 네트워크용 프로토콜 신호도 같이 딸려가는 형태이다. 당연히 낭비가 있다.[각주:4] 그러나 SAN의 10Gbps는 철저히 고속의 내부 데이터 흐름만을 위해 튜닝되어있기 때문에 지연시간이 압도적으로 적다. 아예 인터페이스 자체부터 스토리지 전용으로 설계된 SAS[각주:5] 프로토콜을 쓰기 때문이다. 별도의 SAN용 스위치를 쓰는 이유가 이런 데이터 흐름을 제어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만한 처리 속도를 쓸 수 있는 인터넷 망은 흔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SAN을 써야 할 정도의 민감한 데이터를 언제 해킹당할지 모르는 공개 인터넷망에 물려둘 수는 없기에, SAN은 외부망에서의 접속을 차단해 놓는다. 데이터가 오가는 포트도 고성능/고신뢰도/고가격의 FC(Fiber Channel)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SAN장비는 이 FC용 확장 카드를 추가로 PC에 꽃아서 사용하도록 설계 되어있다.

 

프로페셔널 스튜디오에서 성능이나 신뢰도의 문제로 SAN을 쓰는 일이 많은 상황에서, 이 SAN의 제조사들이 보기에 맥 유저는 한 줌도 안되는 집단이라 맥 프로의 썬더볼트 포트를 이용하는 SAN용 FC카드를 만들 필요를 느끼질 못했다. 거기에 지연시간을 줄이기 위해 전용 인터페이스까지 만들어가며 SAN을 개발해 두었는데, 썬더볼트용 브릿지 칩셋을 거치며 속도가 떨어지고 신뢰도 문제가 생기는 부분도 SAN 제조사 입장에서는 거슬릴 일이기도 했다. 결국 썬더볼트용 SAN은 그렇게 흔한 물건이 아니게 되었고, 기존의 SAN용 썬더볼트 변환 어댑터를 사용자가 사제로 만드는 일 또한 신뢰도의 문제로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단 이야기.

 

맥 프로의 주요 시장, 아니 거의 유일하게 남은 시장이라고 해도 좋을 영상용 고가 편집 장비 업계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확장성과 신뢰도, 내구성이 확보되지 않았으니 2013 맥 프로의 참패는 등장 당시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자릴 보고 누워야 하는데, 제품 기획 초기 단계 자체에서 시장 분석에 실패한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사지도 않을 사람들이 맥 프로의 괴상함에 매료되어 찬양하고 사서 써야만 할 사람들은 욕을 하면서도 지갑을 열어야만 하는 웃기는 상황'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틀린 말이라는 생각은 못하겠다.

 

결국 애플의 소비자를 향한 사과와 더불어 모듈형이고 확장성이 있는 맥 프로가 개발중이라는 정보가 작년 즈음에 공개됐고, 그 맥프로가 엊그저께 WWDC 2019에서 발표됐다. 프롤로그가 좀 지나치게 긴 글이지만, 지금의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아서 설명하는데 시간이 들었던 것 뿐이니 모두들 이해해주시길.

 

 

타워맥의 귀환

△ 신형 맥 프로와 프로 디스플레이를 선보이는 팀 쿡

보자마자 살짝 피식했다. 나는 저 손잡이 부분을 잡고 양파를 갈아버리는 상상을 했다. 서양쪽에서는 치즈 가는 강판과 비슷하다는 농담이 오가는 모양이다. 이쯤 되면, 뭔가 노리고 만든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3 맥 프로때도 그러했고, 독특한 디자인으로 이슈가 되는 상황 자체도 마케팅과 브랜딩에 도움이 되니 약간의 유쾌함을 섞는 정도는 애플 내부에서도 용인해준게 아닐까 라는 뜻이다. 경쟁 제품이라 할 수 있는 HP나 델의 워크스테이션들은 블랙/실버 위주의 극도로 보수적인 디자인 문법을 쓰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HP의 Z시리즈에 요즘 유행하는 RGB팬 같은게 달려있다고 생각해보라. 남자 정장에 나이키 스우시가 새겨진 것처럼 어색하지 않겠나.

 

일단 윗부분에 솟아있는 커다란 손잡이는 디자인의 포인트이기도 하고, 작업을 위한 이동이 잦은 스튜디오에서도 손들어 반길만한 일이다. 그리고 여러 대의 맥 프로를 한 곳에 몰아놓고 쓰는 상황을 위해 랙마운트 옵션도 준비되어 있는데, 랙용 장비엔 당연히 크고 튼튼한 손잡이가 필수이다. 그 외에도, 아래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저 손잡이는 본체의 밑바닥부터 쭉 이어져 오는 일종의 골조 프레임 역할도 겸한다.

 

 

 

 

△ 전면 트리플팬의 위용을 보라.(사진은 클릭하면 커짐)

내부를 살펴보면, 일단 앞부분의 커다란 쿨링팬 3개가 눈에 띈다. 팬의 직경은 대충 140mm 전후로 보이고 두께는 흔히 쓰이는 25T 대신 38T 혹은 그 이상으로 보인다. 쿨링팬의 앞뒤 두께가 두꺼워지면 팬의 블레이드 받음각(pitch)을 크게 하여 공기가 일자로 뻗어나가는 힘을 더 높일 수 있는데, 신형 맥 프로는 내부의 완전한 일자형 공기 흐름을 위해 저런 형태의 팬을 사용했다. 그리고, 과거의 타워형 파워맥/맥 프로 처럼 다시 전면흡기형 쿨링 구조로 되돌아왔다.

 

흡기형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한 김에 더 써보면, 원통 맥 프로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던 쿨링 문제에 일조했던 것이 '배기형' 쿨링이었다는 점이다. 똑같은 쿨러를 방열판의 앞에 대서 공기를 밀어주는 형태로 만드는 것과 방열판의 뒤에 붙여서 공기를 당겨주는 형태인 것은 효율의 차이가 꽤 난다. 일단 공기는 기체상태이기에 딱딱한 고체처럼 밀거나 당기는 만큼 그대로 움직이지 않기 마련인데, 이 때문에 방열판의 뒤에서 팬이 열심히 공기를 잡아당긴다 한들 팬이 만들어내는 공기 흐름만큼 방열판 근처의 공기가 빠르게 움직여주지 않는다.[각주:6] 반면, 방열판 앞에서 팬이 공기를 불어주는 형태라면 팬에서 공기가 가속된 직후 가장 빠른 상태로 방열판을 통과할 수 있다. 공기의 유속이 빨라 같은 시간에 더 많은 공기가 지나갈수록 더 많은 열을 식혀줄 수 있기에 원통형 맥 프로의 등장 이후에 내가 가장 궁금해 했던 점이 어째서 하단에 흡기팬으로 달아서 만들지 않았을까 라는 부분이었다.

 

△ 드디어 큼지막한 CPU 쿨러를 가지게 되었다.

신형에서는 다시 전면 흡기로 되돌아왔으니, 팬의 RPM 대비 방열판을 지나가는 공기 흐름은 크게 나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CPU용 방열판도 전에 없이 큼직하고 넉넉하게 설계되어 있으니 온도 문제는 예전만큼 심각하진 않을 것 같다. 일단 애플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CPU 히트싱크의 냉각용량은 300W 이상이다. 부피로 보아도 대충 PC용 최상급 타워형 공랭 쿨러에 준한다.

 

다만, 소음을 위해서인지 방열핀의 두께 자체는 굉장히 얇은 편이다. 통상적으로 최상급 공랭 쿨러들은 히트파이프에서 전달받은 열을 방열핀[각주:7] 전체로 잘 전달하기 위해 적당히 두껍게 만드는 편인데, 신형 맥 프로에서는 앞뒤 길이를 늘려서 방열핀의 면적을 더 넓게 만들고 히트파이프를 U자형으로 구부린 뒤 방열핀의 앞뒤로 두 번 접촉시켜 열 전달 효율을 올리는 쪽을 택한 것 같다. 특히 낮은 RPM에서도 높은 풍압을 만들기 위해 두꺼운 팬을 사용한 것과 방열판 넉넉하게 벌린 부분들을 보아도 그렇다. 애플은 언제나 저소음을 좋아했으니까. 뒤에 이야기 할 내용이지만 VGA쪽의 방열판도 마찬가지로 부피는 키우되 방열핀 사이의 간격은 넉넉하게 벌려두었다. 마찬가지로 공기가 지나가면서 생기는 풍절음을 최소화 하기 위한 설계이다.

 

뭐가 됐든, 적어도 저소음을 위해 예전처럼 발열 처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 핵심이다. 바로 전작인 아이맥 프로 조차도 발열 설계에 문제가 많다 싶었는데, 드디어 제대로 만들어놓았다. 참으로 다행스럽다.

 

△ 2013 맥 프로의 통합형 히트싱크.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구형 맥 프로에서는 3개의 고성능 반도체[각주:8]에서 뿜어져 나오는 합계 500W급의 발열을 겨우 사람 팔뚝만한 삼각형 방열판 하나로 식히려다 온도가 마구 치솟았는데, 이번엔 CPU와 GPU에서 발생하는 열을 따로 처리하는 방식이 되었다. 사실, 히트싱크를 통합한다는 생각 자체가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다. 통상의 PC가 그러하듯 발열체마다 히트싱크를 따로 넣어주든, 맥 프로나 노트북처럼 통합 히트싱크로 처리하든 소비자 입장에서 신경 쓸만한 부분은 아니니까. 뭔가 새롭고 혁신적인 느낌을 위해 저런 방식을 선택했나 싶은데, 히트싱크의 배치 방식까지야 취향의 문제라지만 냉각 용량 계산을 잘못하고 쿨링팬을 엉뚱한 방향에 달아둔 것이 문제이다.

 

원통 맥 프로에서 CPU 온도가 100도에 육박하는 것도 쓰로틀링이 걸리면서 내부 온도를 낮추려 드니까 그 정도였지, 쓰로틀링이 풀렸으면 온도는 훨씬 더 높게 찍혔을 것이다. 반복해서 이야기 하지만, 구형 맥 프로의 발열 설계는 어떻게 해도 합리화를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 CPU는 1Socket이다. 기본 옵션은 8코어, 옵션에 따라 최대 28코어 제온까지 선택할 수 있다.

다시 신형 맥 프로로 돌아와보면, 애석하게도 과거의 타워맥처럼 2CPU는 불가능하다. 마더보드나 다른 공간에 여유가 전혀 없어서 완전히 풀모델 체인지가 되지 않는 한 2소켓 CPU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부분은 조금 아쉬운데, 인텔이 LGA3647 소켓으로 얼마나 더 많은 코어를 욱여넣을 수 있을지 아직 알 수 없어서 그렇다. 특히 인텔이 공정 설계에서 헤매는 중이라 지금의 맥 프로에 호환되는 신형 고성능 CPU를 언제 내놓을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이다. 즉, 이번 맥 프로도 최악의 경우엔 2013 맥 프로처럼 큰 업그레이드 없이 그냥 줄창 쓰다가 퇴역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x86에 대한 애플의 입장이 애매해서 나온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장기적으로 애플의 ARM 이주는 거의 확정 정보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이고, 이게 맞다면 2019 맥 프로의 성능이 너무 초월적으로 높아도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일단 ARM 진영에서 빅칩이 나와서 성공한 사례가 없다. 퀄컴이 서버시장 진출을 선언하며 Centriq 2400이라는 대형 ARM칩을 만들어서 시장 진출을 했으나 ARM 특유의 성능 구조가 일부 스케일아웃[각주:9] 시장을 제외하고는 별 매력이 없었다. 서버 시장에 신규아키텍쳐를 가지고 진입하려면 라인업을 다양화 해서 융단폭격을 하며 들어가도 시장의 보수적 특징 때문에[각주:10] 자리 잡기가 쉽지 않은데, 제한적인 영역에서만 소폭 우위를 보이는 CPU 1종으로 시장에 들어갔으니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이야기가 잠시 샜는데, 애플이 ARM 아키텍쳐로의 이주를 시작한다면 당연히 맥북같은 노트북 라인업 부터 시작될테고, 이건 지금 당장이라도 애플 스타일로 밀어붙이면 성공을 점쳐볼만 하다. 이미 노트북 레벨에서는 ARM이 충분히 x86을 따라잡았다 할 수 있을만큼 고성능화가 진행된 상황이고 BT[각주:11]등을 통해 아키텍쳐를 옮겨간 경험이 애플에겐 이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버시장, 혹은 서버의 부품을 일부 가져다 쓰는 WS시장에서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ARM 진영에서 빅칩이 성공한 사례도 없고 그 인텔조차도 현행 제온 플래그쉽들의 670mm^2짜리 다이는 수율이 35%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고단해하는 상황이다. 거기에 ARM 아키텍쳐가 각 코어의 성능은 대단히 뛰어나지만, 코어와 외부를 연결시켜주는 인터페이스 관련된 부분에서는 몇 년간 큰 성능 발전이 없었던 것도 문제가 된다. 노트북처럼 연결되는 장치가 PCI-E레인 20개 수준이라면 그리 치명적이지 않겠지만, 서버와 WS쪽에서는 100개 이상의 레인숫자가 필요하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결국 현행 28코어 제온과 그 이후 신제품의 성능까지도 초월할만한 ARM CPU가 등장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애플이 무턱대고 성능을 올리는 쪽을 택하진 않았을 것 같다는 뜻이 되겠다. 그리고 현재 맥 프로가 활약할 시장이 CPU 성능에 그렇게 극도로 민감하지는 않다는 사실이 이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 맥 프로에 장착될 라데온 프로 베가2 듀오의 모습. 보조전원 케이블 없이 슬롯 파워로만 전력을 공급받는다.

맥 프로의 주 활동 무대인 영상 작업 시장의 연산 장치는 CPU에서 GPU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GPGPU[각주:12]의 등장과 끝없는 발전, 그리고 영상 작업의 특수성이 더해진 결과이다. GPGPU는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지만 영상 작업 쪽에서 유독 효과가 좋은데, 그 이유는 영상 작업의 경우 다루는 데이터의 크기가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사진처럼 작은 데이터라면 메인 메모리(RAM)에서 그래픽 메모리(VRAM)쪽으로 데이터를 올리고 내리는 작업에서 발생하는 지연시간 문제가 성능의 발목을 잡게 된다. 데이터를 올리는 시간, 데이터를 GPU가 처리하는 시간, 데이터를 다시 RAM으로 가져오는 시간까지 해서 3개의 사이클을 거쳐야 하는데 자잘하게 데이터를 올리고 내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GPU의 CPU대비 강력한 처리능력으로 데이터 처리에서 단축한 시간을 다 깎아먹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오버헤드가 커서 연산성능을 활용하기 어려운 상황에 가깝다.

 

영상 작업에서는 데이터 자체가 원체 크다보니 한 번 VRAM에 데이터가 올라가면 장시간 내려오지 않고 GPU의 파워를 이용하여 연산한 뒤 결과물이 출력된다. 즉 전체 총 연산 시간에서 데이터를 올리고 내리는 시간의 비중 자체가 크게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를 위해 라데온 베가 2 프로 듀오에는 1개의 GPU당 32GB의 HBM[각주:13]이 장착됐다. 1개의 카드엔 2개의 라데온 프로 베가 칩이 장착될 수 있고, 맥 프로는 총 2개의 카드를 달아줄 수 있으니 최대 128GB의 대용량 메모리를 VRAM으로 쓸 수 있다. 이번 맥 프로는 옵션에서 메인 메모리를 최대 1.5TB까지 넣을 수 있는데, 이는 GPU의 넉넉한 VRAM을 빠르게 채워주기 위해서는 메인 메모리도 넉넉해야 해서 그렇다. 기존의 맥 프로가 고작 64GB까지의 메인 메모리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각주:14]

 

어차피 맥 프로는 영상 작업용 머신으로 굳어져가는 상황에서 CPU 파워가 경쟁사[각주:15]의 경쟁모델들[각주:16] 대비 모자란 건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맥에서 쓰는 파이널 컷과 다빈치 리졸브등의 툴은 GPGPU를 잘 지원하니 문제가 없으리라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 결과물이 당장의 높은 성능을 제공하면서도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형태로 CPU는 1소켓만 쓰되, GPU에 힘을 실어주는 쪽으로 개발한 2019 맥 프로라는 것이 내 결론. 이야기 하고 나니 드는 생각인데 2019 맥 프로는 ARM으로의 이주라는 과도기에 대비하면서도 현재의 시장은 놓칠 수 없는 애플의 애매한 입장이 여러모로 반영된, 대단히 정치적인 물건이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 라데온 프로 베가 2 듀오의 방열판. 보다시피 꽤 크다.

CPU와 마찬가지로 GPU쪽 쿨링에도 신경 쓴 티가 많이 난다. 당장 눈에 보이는 히트파이프는 없지만, 바닥면엔 히트 스프레더 역할을 하는 베이퍼챔버[각주:17]가 깔려있을 것이 쉽게 예상되고, 그래픽카드 전체의 면적을 다 가릴 정도로 큼지막한 방열판이 달려있으니 2GPU가 들어간다 해도 예전처럼 발열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케이스 전면 팬이 만들어내는 바람으로 쿨링되는 패시브 방식이기 때문에 방열판 간격은 CPU 히트싱크와 마찬가지로 널찍하게 벌려져 있고, 핀의 두께는 CPU쪽 보다는 약간 두껍다. 7nm로 만들어진 베가는 현재 시장에 존재하지 않는데다,[각주:18] 2GPU가 1개의 카드에 달린 물건조차도 없어서 해당 카드의 총 소모전력은 추정하기 어렵다.[각주:19] 그러나 '뭐가 됐든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 안도의 마음은 들 정도로 방열판이 충분히 크다.

 

△ 다시 내부 전체 사진. 2개의 VGA 위로 얇은 판때기 한 장과 확장 슬롯들이 보일 것이다.

맥 프로가 영상편집에 사실상 올인한 설계라는 것이 옵션에서도 드러난다. VGA위의 1슬롯짜리 카드는 애플의 파이널컷에서 사용하는 ProRES 코덱 전용 가속 카드라고 한다. 당연히 꽃으면 성능이 엄청 오르게 된다. 그 외에도 이 글의 첫 문단에서 지적했던 확장 슬롯 또한 되돌아왔다. 이제 SAN 카드를 꽃아서 고속의 외부 스토리지를 쓸 수도 있고, SAN이 없이 DAS[각주:20]를 쓰는 사용자라면 SAS 컨트롤러를 달아줄 수도 있다. 그럴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_- 인피니밴드[각주:21]용 카드를 꽃을 수도 있겠다.

 

△ 화살표 친 자리엔 뭔가 추가로 매달아 줄 만한 공간이 보인다.

딱 하나 궁금한 건 확장 슬롯 상단의 뭔가 알 수 없는 포트 뭉치이다. 2.0/3.2 Gen1[각주:22] 겸용 Type A 포트 하나와 S-ATA포트 두 개, 그리고 뭔가 알 듯 모를 듯한 파워 커넥터 비슷한 물건이 달려있다. 그리고 그 위의 공간은 비어있는데, 낭비 없는 설계를 지향하는 애플이 이런 공간을 괜히 비워 두었을 리는 없다. 위 사진의 화살표 친 자리에 뭔가 매달아둘 수 있을만한 하드 포인트가 있는 걸 생각해보면, 추후 옵션으로 2 개의 3.5인치 S-ATA 디스크를 달아서 쓸 수 있게 만들어 둔 것 아닐까 싶다. 특히 5x2 배열의 핀이라서 더욱 그렇다. S-ATA는 파워 포트에서 12V, 5V, 3.3V 세 개의 전압을 쓰고 이중 5V와 3.3V는 그라운드 핀을 공용으로 쓰기 때문에 1포트당 총 5개의 핀이 필요하다. 처음엔 혹시라도 일반 PC용 VGA를 쓸 수 있게 보조전원을 빼놓은건가 싶었는데, 애플 스타일 대로라면 보조전원이 들어갈 자리 가까이에 핀을 배열했지 저랬을 것 같진 않다. S-ATA 데이터 케이블을 이용한 뭔가 다른 하드웨어가 있을까 고민해봤지만, S-ATA는 데이터/전원 커넥터를 가리지 않고 규격 자체가 결함 규격에 가까워서 다른 통신을 위한 장비에서 S-ATA 커넥터를 쓰는 일이 거의 없으니 아무래도 현실성이 없다는 생각.

 

USB포트는 나도 뭔지 전혀 감이 안온다. 수리 센터에서 저 자리에 특수한 USB 형식의 하드락을 꽃아야만 T2칩의 데이터 암호화를 복호화해서 내장 SSD의 데이터를 백업한다든가 뭐 이런식일까 싶기도 한데, 맥북처럼 SSD가 납땜 된 물건도 아니고 그냥 뽑아다 전용 기기에 돌리면 그만인 걸 굳이 저렇게까지 해놨을 이유는 없다. 그 옆의 잠금장치는 뭘 잠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예쁘다. 새다리 같은 받침대만 빼고.

뭔가 초보자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개념들을 설명하려 하니 글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는 느낌인데, 결론적으로 이번 맥 프로는 잘 만든 것 같다. 전작에서 지적받던 점들을 거의 다 해결했고, 미래에 성능을 얼마나 더 올릴 수 있을지 약간 걱정스럽긴 해도 현재 애플의 플래그쉽 워크스테이션인 아이맥 프로 대비 꽤 큰 성능 향상을 이뤄냈다. 디자인이 조금 묘하거나 웃기다는 평은 있지만 못났다는 평보단 희한하다 정도의 느낌이 지배적인 것을 볼 때 시간이 흘러 뇌이징을 거치면 예전의 아이폰들이 그러했듯 별 문제로 안느껴질 것이다.

 

자, 이제 맥 프로 이야기는 대충 이 쯤에서 마무리 하고, 프로 디스플레이 XDR로 넘어가겠다. 글을 끊어서 쓰고 싶지만 안티 애플을 지향하는 내 블로그에서 애플 신제품 관련 포스팅이 두 개나 상위에 올라가 있는 꼴은 못봐주겠다. 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좀 까고 넘어가겠다. 받침대는 왜 저렇게 만든건가. 꼭 낭창낭창한 새다리 같다. 쓸데없이 자리차지하게 뭐 저렇게 해놨나. 저 밑으로 로봇청소기라도 지나 다니란건가?

 

 

감동의 프로 디스플레이 XDR

△ 불안해보이는 스탠드만 제외하고 예쁘다.

일단 아름다운 자태부터 감상하고 넘어가겠다. 베젤이 넓다 못해서 날씨만 좋으면 3모작도 가능할 것 같던 아이맥의 디스플레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스탠드에 대해서는 도통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지만 그건 아래로 넘기고, 일단 2019년 최신의 기술과 감성에 걸맞는 디자인이라는 생각은 다들 동의하리라 믿는다.

 

디자인 뿐만 아니라 공개된 스펙도 대단하다. 32인치에 6016x3384해상도, 지속 밝기 1000니트에 최대 1600니트 가능, 그리고 여간해서는 LCD에서 달성하기 힘든 1:1,000,000 명암비에 P3컬러까지 수치 하나하나 허투루 만든 부분이 없다. 이쯤 되니 기본형 5000달러, 저반사 나노코팅 모델의 6000달러라는 가격마저도 너무나 저렴해보인다. 적어도 윈도 진영엔 이런 가격은 고사하고 이런 스펙의 모니터가 존재하지도 않는다.[각주:23] 델에서 8K 모니터가 $4000 정도에 나오긴 하지만 용도와 스펙이 달라 직접 비교가 조금 어렵다.

 

이 모델의 수치상 성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만한 성능이 나오게 되는 기술적 이면을 떠올려보면 더욱 대단하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HDR이라는 개념부터 설명해야 하니 그것부터 살펴보겠다.

 

△ HDR의 차이를 시뮬레이션 해서 보여주는 이미지. 대부분의 모니터가 HDR을 제대로 적용하진 못하기 때문에 대충 차이가 난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HDR은 High Dynamic Range의 약자이다. 문자 그대로 색의 범위[각주:24]가 넓다는 뜻이다. 이에 대응되는 좁은 색깔의 범위는 SDR[각주:25]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양쪽 이미지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뚜렷하게 보일것이다. HDR쪽은 어두운 곳은 더욱 어둡고, 밝은 곳은 더욱 밝게 표현하면서 명암대비가 뚜렷해지고, 이로 인해서 백사장이나 파도 같은 부분의 디테일들이 더 잘 보이게 된다. 사진 가장자리의 섬 부분도 SDR 이미지에서는 시꺼멓게 보이는 것이 전부이지만, HDR 이미지에서는 나무의 모양이 다 보인다.

 

즉, HDR은 밝고 어두움의 차이를 카메라가 좀 더 잘 측정해서 실제 사물, 혹은 영상의 미세한 부분까지 디테일을 살려주는 원리이다. 여기서 '잘' 측정한다는 건 센서의 민감도를 올리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 빛과 어둠의 차이를 계산해내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폰카에서도 요즘 HDR 사진을 찍는 기능이 흔히 들어가있는데, 사진의 노출 시간을 줄이되 여러 장을 찍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노출 시간이 줄어들면 빛이 충분히 들어오지 않아 사진이 어두워지는데 그 손해는 민감도 높은 센서로 해결을 하고, 대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서 비교한 뒤 빛의 양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왜 그냥 쭉 한장을 길게 찍지 않냐고? 그렇게 찍으면 사진이 흔들리니까-_-.

 

영상쪽에서도 HDR 촬영을 위해서는 민감도 높은 고성능의 센서와 높은 프레임수가 필요해진다. 사진을 여러장 묶으면 그게 영상이기에 기본 원리는 완전히 같다. 그리고 이렇게 촬영된 사진/영상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당연히 소프트웨어와 모니터도 HDR을 지원해야 한다. 특히 모니터에서는 빛과 어둠의 경계가 뚜렷해지는 HDR을 위해 밝을 땐 더욱 밝고, 어두울 땐 더욱 어두워지는 디스플레이 패널이 필요해진다. 문제는 기존의 LCD의 경우 대부분 백라이트가 상시 켜져있는 방식인데다 어두운 부분을 어둡게 표현하기 위해 일부 백라이트를 끄더라도[각주:26] 몇 개 되지 않는 백라이트로 넓은 화면의 밝기를 모두 조절할 수는 없기에 높은 명암비를 달성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대형 TV 시장엔 OLED가 들어가게 됐고, 과도기적 기술로 2장의 TFT를 겹쳐서 밝기를 조절하는 LCD 모니터도 나오곤 했다. 애플이 프리젠테이션에서 언급한 13000불짜리 에이조 모니터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물건이다.

 

2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