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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거리 잔혹사 - 치타의 멸종

SWEV 2015.05.09 05:07

치타가 사라졌다

 

 

 시게이트는 서버용 HDD를 개발하며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맹수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최고속도 110km/h, 0 -> 100km/h 가속시간 3초, 100m 달리기 3초. 속도가 곧 가치의 기준인 컴퓨터 부품에서 '치타'만큼 딱 맞는 이름이 또 있었을까.

 

시속 400km로 활강한다 알려진 군함조도 있겠지만 중력을 이용한 활강속도일 뿐이라 별 것 아닌 느낌인데다 치타같이 사나운 맹수의 느낌도 없다. 그것보다도 나는 어떻게 중력을 이용해서 시속 400km가 되는지 그것부터 좀 알고 싶다. 계산해보니 공기저항 없는 조건에서도 1km 상공에서 떨어져야 400km/h가 나오는데 무슨놈의 새새끼가 그렇게 힘이 좋아서 거기까지 올라가는지 원...아니 그것보다도 진짜 400km/h가 나오긴 하나?

 

아무튼간에, 시게이트의 플래그십 HDD 브랜드는 치타였고 그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얼마전에 시게이트 홈페이지를 들어갔다가 조금 놀랄 일이 있었다.

  

 

Cheetah라는 브랜드는 완전히 없다. 그리고 시게이트의 또다른 기업용 SCSI 디스크 라인업인 Savvio 라인업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Enterprise Performance HDD라는 두루뭉실한 브랜드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페라리 같은 좋은 브랜드명을 숨겨두고 '고급 스포츠카'라고 써놓은 꼴이다. 거기에 더 황당한 건, 2.5인치 HDD라고 페이지 윗쪽에 써있는 점이다. 치타와 쌔비오 둘다 시게이트의 서버용 HDD 제품군인데 치타는 데스크탑 HDD와 같은 3.5인치 크기였고, 쌔비오는 2.5인치 크기였다. 즉, 치타는 이제 팔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너무 황당해서 제품 카탈로그를 싹 다운받아서 다시 확인해 봤지만 여전히 없었다. 3.5인치 HDD 자체가 기업용 제품 카탈로그에 전혀 없는 것이다. 쌔비오만 남았다.

 

혹여 2.5인치라고 해서 노트북에 달 생각을 하지 말길.(진짜로 넣을 수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쌔비오는 2.5인치지만, 노트북에 달린 2.5인치 HDD자리에 달 수는 없다. 두께가 2배 가까이 두꺼운데다 노트북에는 쌔비오를 굴릴 때 필요한 12V 전원 공급 라인이 없다. 잠깐 옆으로 샜는데, 치타가 사라지고 쌔비오만 남았다는게 결론이다. 쌔비오라는 제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생긴 과정을 알아낼 수 없다. 그래서 쌔비오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쌔비오의 탄생

서버용 HDD는 광고를 열심히 한다고 잘 팔릴 물건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버 관리자들은 뭔가 환경이 바뀌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완전히 새로운 물건을 들이미는 일은 제조사 입장에서 모험이고 도박이 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쌔비오처럼 뜬금없는 물건이 나오기란 정말 쉽지 않다. 데스크탑 HDD야 단품으로도 잘 팔리는 물건이지만 서버용 HDD는 애시당초에 완제품 서버 제조사들을 통해서 팔려나가는 비율이 높기 때문에 제조사들이 찾지 않을 물건을 굳이 개발비 들여가며 만들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쌔비오는 아주 특이한 태생을 가진다. HP나 델 같은 서버 제조사에서 시게이트에 이런 HDD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서 만들어진 물건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새로운 물건을 기획하거나 개발하고 그 장점을 설명하기 위해 소비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쌔비오는 정 반대로 소비자들이 먼저 제품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해서 개발이 시작되었다는 점이 묘하다. 그렇다면 왜 서버 제조사들이 쌔비오 같은 2.5인치 서버용 HDD를 요구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다시 정리해서 이야기 하면, 기존의 3.5인치라는 틀을 버리고 2.5인치 형태로 만들어서 과연 무엇이 더 좋아졌는지 보아야 한다.

 

 

△ 쌔비오와 치타의 크기 비교. 쌔비오는 치타 크기의 절반도 안된다.

 일단 1개의 HDD 자체의 덩치가 작아졌다. 거의 모든 데스크탑 PC는 내부공간에 여유가 많다보니 HDD 한 두개의 크기가 줄어들어도 그게 썩 쓸모있지는 않다. 그러나 서버시장으로 가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 서버들은 보통 이렇게 안쪽에 빈 자리 없이 부품을 채운다.

서버는 같은 성능이라면 덩치가 작을수록 좋다. 수백 수천대의 서버를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러대의 서버가 한 곳에 몰려있을수록 관리하기가 편하고 좀 더 작은 건물 안에도 많은 서버를 넣을 수 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서버는 랙마운트라는 전용 책장 안에 차곡차곡 쌓인 모습으로 굴러간다. 위의 그림이 랙마운트에 들어가는 서버들의 생김새이고, 납작한 생김새처럼 안을 까보면 부품들이 빽빽하게 들어차있다.

 

△ 같은 크기 안에 더 여러 개의 디스크를 쓸 수 있다.

1U 랙서버에서 기존의 3.5인치 디스크를 사용하게 되면 HDD는 최대 4개까지 밖에 못들어간다. 그런데 쌔비오를 사용하면, 1U 서버 사이즈에서도 디스크를 10개나 쓸 수 있게 된다. 크기를 줄이면서 용량이 줄어들었기에 1개의 디스크 용량은 작아질 지 몰라도 공간 낭비 없이 훨씬 더 많은 디스크를 때려박을 수 있기 때문에 전체 용량에서 따지면 2.5인치 디스크를 여러 개 달아준 쪽이 더 컸다. 그리고 디스크를 여러 개 쓰면서 RAID를 구성할 때 좀 더 다양한 디스크 어레이를 구성할 수 있었다. 4개의 디스크 뿐이라면 3개의 디스크를 RAID 5로 묶고, 1개의 디스크에 운영체제를 얹는다거나 4개의 디스크를 전부 다 RAID 5로 묶는 방법 말고는 딱히 다른 RAID 구성법이 없다. 하지만 10개의 디스크는 RAID 5 볼륨을 3개 만들어도 좋고 예전엔 용량낭비가 심해서 사치스럽게 느껴지던 RAID10 같은 짓도 해볼 수 있다.

 

△ 플래터의 지름이 줄어들면서 엑추에이터 암이 움직여야 할 거리 자체가 짧아졌다.

2.5인치 플래터를 쓰게 되면 엑추에이터 암이 움직여야 할 거리도 줄어든다. 엑추에이터 암 끝에 달려서 데이터를 읽어들이는 헤드가 움직여야 할 거리 자체가 짧아지니 엑세스 타임이 짧아지는 효과가 있다. 3.5인치 서버용 10,000RPM 디스크는 진동을 줄이기 위해 3.5인치 플래터를 쓰지 않고 3인치 플래터를 썼는데, 3인치 플래터를 쓰면서 엑추에이터 암이 움직일 거리가 줄어들다보니 엑세스 타임이 꽤 크게 좋아지곤 했다. 그리고 쌔비오에서 2.5인치로 겉 크기가 줄어들면서 플래터 지름도 같이 2.5인치로 작아진다. 덕분에 쌔비오는 같은 RPM으로 회전하는 3인치 플래터의 치타 10K보다 레이턴시 성능이 훨씬 좋다.

 

똑같이 10,000RPM으로 회전한다면 지름이 클수록 바깥쪽의 데이터를 읽어들이는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에 쓰루풋 성능이 좋다. 2.5인치로 플래터 지름을 줄여버린 쌔비오는 엑세스타임이 줄어드는 대신 전송률 면에서 기존의 3.5인치 서버용 디스크 보다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허나 서버 시장에서는 RAID를 거의 필수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쓰루풋 성능이 줄어드는 것은 RAID를 통해서 메꿀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서 플래터당 기록 밀도가 올라가게 되면 해결이 될 일이라 크게 밑지는 장사는 아니게 된다. 오히려 엑세스 타임을 줄여서 레이턴시를 최소화 하는 쪽이 성능상 더 나았기에 서버 관리자들은 두손 들고 환영했다. 그리고 최신의 쌔비오는 저런 이유로 2.5인치 플래터 보다도 조금 더 작은 2인치 정도의 플래터를 사용한다.

 

엑세스 타임 말고도 2.5인치 플래터의 장점은 많았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플래터의 지름이 작아지면 진동도 줄어든다. HDD는 매우 예민하기에 진동이 커서 좋을게 눈꼽만치도 없고, 당연히 진동이 작을수록 신뢰도는 좋아진다. 플래터의 무게가 크게 줄어서 전기도 훨씬 덜 먹는다. 1U 크기에 넣을 수 있는 숫자 기준으로 2.5인치 디스크 10개나 3.5인치 디스크 4개나 전기 먹는 양은 그게 그거다. 허나 예전에 비해서 1대의 서버가 낼 수 있는 성능이 휠씬 뛰어났기 때문에 서버의 숫자를 줄일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전력소모는 훨씬 줄게 되었다.

 

 

치타의 멸종

2.5인치 디스크가 여러모로 좋은 물건이었고, 애초에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회사들이 있었기에 쌔비오는 서버 시장에 아주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2.5인치라는 크기의 가능성을 본 씨게이트는 최초의 10,000RPM 쌔비오에 이어서 15,000RPM 쌔비오도 내놓는다. 

△ 15,000RPM의 회전 속도를 자랑하는 치타 15K의 내부 구조. 빨간 네모 안을 주목하자.

위의 사진을 자세히 보면, 치타 15K는 3.5인치 HDD의 크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미 핵심 부품은 2.5인치 HDD 껍데기 안에 쑤셔넣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작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5인치 HDD 크기의 빨간 네모 안에 HDD의 핵심 부품인 플래터와 엑추에이터 암, 보이스코일등이 다 모여있는 것이 그 증거다. 15,000RPM 디스크들은 진동과 발열, 전력 소모등의 이유로 처음부터 3.5인치 규격을 쓰면서도 2.5인치 플래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내부에 장착된 부품들도 오밀조밀하게 모여있어 3.5인치의 크기를 굳이 유지할 필요가 딱히 없었다.

 

쌔비오의 성공으로 2.5인치 디스크를 장착할 수 있는 케이스와 서버 제품군들이 늘어나면서 자리만 더 차지하고 특별하게 더 나을 것이 없었던 치타 15K는 7세대를 끝으로 결국 시장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치타가 사라지며 비어버린 플래그쉽 HDD의 자리는 쌔비오 15K가 차지하게 된다.

 

 

서버 스토리지의 과거와 오늘

멀티코어가 등장하기 전엔 CPU를 2개 달아서 2개의 코어를 쓰는 것이 1U 사이즈 안에서 낼 수 있는 최대의 연산 성능이었고 그 정도의 CPU 성능이라면 당시 쓰이던 서버용 HDD가 충분히 빠르게 데이터를 공급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별 탈이 없었다. 그러나 쌔비오가 등장하던 즈음엔 멀티코어가 대중화 되면서 1U 사이즈 안에서도 8개의 코어를 내장할 수 있었고 CPU 성능이 크게 좋아진 것에 비해 HDD 성능이 따라가질 못하는 일이 생겨버렸다. 결론적으로, 개별 HDD의 크기를 줄이고 여러 개를 RAID로 묶어서 스토리지의 병목현상을 줄이자는 것이 쌔비오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쌔비오의 성공 뒤에 HGST나 WD도 2.5인치 서버 디스크 시장에 진출하게 되며 덩치 크고 전기 많이 먹는 3.5인치 디스크는 서버 시장에서 쫓겨나버렸다.

 

△ 모듈을 교체중인 블레이드 서버

요즘은 한술 더 떠서 1U 사이즈면 최대 36개의 코어를 쓸 수 있고 1U도 공간 낭비가 심하다고들 생각하다보니 아예 블레이드 서버 처럼 전원 유닛과 냉각 장치는 공용으로 쓰고 연산 유닛을 압축시켜서 부피를 줄인 서버들이 유행하게 된다. 2.5인치 디스크들이 크기가 작다보니 블레이드 서버에 끼워넣기도 쉬워서 처음엔 별 탈이 없었지만, CPU들의 멀티코어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1개의 CPU 안에 18개의 코어를 쑤셔박은 물건도 튀어나오다 보니 쌔비오 15K로도 성능이 턱없이 부족한 일이 많아졌다.

 

△ IBM의 올플래쉬 스토리지

 

다행스럽게도, CPU 성능 뿐만 아니라 플래쉬 메모리의 기록 밀도와 성능도 크게 좋아져 올플래쉬 스토리지라는 물건이 튀어나온다. 올플래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SSD처럼 플래쉬 메모리만을 사용하여 저장하게 되는데 기존의 랙마운트 타입 케이스에 SSD를 주렁주렁 달아서 만든 물건도 있고 IBM처럼 아예 전용 인터페이스와 규격을 만들어서 한 단계 더 높은 성능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위의 스토리지는 고작 2U 사이즈 정도의 자그마한 물건이지만 기존의 HDD 기반 스토리지들보다 수십~수백배 이상 빠르다. 크기가 작으니 자리 덜 차지해서 좋고 기존의 HDD 시스템들처럼 전기를 왕창 먹어대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지금 만나는 미래라 할만하다.

 

치타가 워낙 HDD 업계에서 상징적이고 강력한 존재이다 보니 서버용 하드웨어에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시절에 언제나 써보고 싶은 하드디스크 1순위였다. 정작 지금은 치타보다 몇 배는 빠른 SSD를 쓰고 있어서 사고 싶은 이유가 완전히 사라졌는데, 그렇다 해도 라인업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여러모로 충격이 크다. 마치 어릴적에 영화를 보고 미인 여배우에게 완전 빠졌는데 나이들고 근황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죽었다는 뉴스 기사를 본 충격 같은 그런 느낌? 시간이 흘러도 변함 없이 가치가 유지되는 하드웨어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는 결론만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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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을 참아가며 HDD 그림을 그렸던 것이 아까워 PSD 원본째로 업로드 해둔다. 상업적 이용이든 뭐든 아무 신경 안쓰니 필요하면 마음껏 갖다 쓰시라.

 

 

쓸데없이 덧붙이는 이야기

 

△ 맹수인지 집고양이인지... 

치타는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 중에서 가장 순하고 사람에게 애교가 많은 동물이다. 번식이 어려운 것만 아니었다면 애저녁에 가축처럼 키우고들 살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실제로도 치타를 애완 동물로 키우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러니 다들 치타를 예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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