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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망상

SWEV 2015.07.19 17:27

얼마 전 AMD는 라데온의 플래그쉽 브랜드로서 '퓨리'를 내놓았다. 라데온 이전에 ATI가 쓰던 그래픽카드 브랜드인 Rage의 최상위 기종들에만 붙는 브랜드가 퓨리었고, 라데온으로 바뀐지 10년 즈음 지나고 나니 이젠 라데온에도 최상위 기종에는 퓨리가 붙는단다. 퓨리든 뭐든 어차피 내 관심사는 고성능 게이밍이 아니기 때문에 눈이 가지 않았고 작은 기판 안에 잘도 플래그쉽 VGA를 만들어 넣었구나 라는 생각 정도만 하고 지나갔다.


△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건 이럴 때 쓰라고 나온 표현이다.

반도체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덕분에 황당하리만치 작은 크기로 고성능을 끌어내는데 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소모전력이나 발열은 예전의 플래그쉽 VGA들과 별 차이가 없고 결국 그래픽카드 본체보다 더 부피가 큰 쿨러를 달아야 하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시대이다 보니 저렇게 엉뚱한 제품이 튀어나오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리고 예전에도 플래그쉽 VGA에 수랭 쿨러를 달아놓은 물건이 있었으니 이제와서 수랭 쿨러를 달아둔 것을 가지고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허나 냉각 장치 같은 주변 산업이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혼자 앞서나가는 반도체 기술을 보며 아 이건 뭔가 아닌데 하는 마음이 드는 사람은 나 말고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저런 모양새를 해놓고도 경쟁사 제품을 완벽하게 찍어누르지 못하는 성능은 말 할 것도 없고.

 

아무튼 AMD의 라데온 퓨리는 나한테 옛날 생각이 나게 만드는 이름과 라디에이터에 장착된 팬이 꽤 좋은 물건[각주:1]이라는 것 말고는 썩 와닿지 않는 물건이었는데 함께 발표된 다른 물건이 눈에 띄었다.

 

△ 퓨리 다음가는 고성능 VGA인 라데온 나노

뭔가 미묘하다. DVI 포트까지 없애버리고 DP나 HDMI포트로만 출력부를 구성한 걸 보면 플래그쉽 다음 가는 위치라는 것이 확 드러나는데, 크기는 고작 15cm 남짓이란다. 한 술 더 떠서 AMD가 프리젠테이션에서 밝힌 소모전력은 고작 175W이다. 사실 경쟁사의 GTX970도 17cm짜리 모델이 나와있지만, 그건 플래그쉽을 줄여놓은 모델이라기 보다는 애초에 중고가형으로 설계를 해놓은 물건이란 느낌이라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아예 플래그쉽인 퓨리를 기반으로 클럭만 살짝 낮춘 수준이라 아무래도 고해상도 게이밍에서 970보다는 나을거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또 망상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언제나 내가 바라는 컴퓨터는 작고 빠른 컴퓨터이기에 라데온 나노를 보면서 머릿속에서 쓸데없는 생각들이 지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티즈가 페라리보다 빠르다고 하면 짜릿할 것 같지 않은가.

 

 

△ 애즈락 메인보드가 아수스와 기가바이트보다 비싼 날이 다 올줄이야....

사람들이 '가성비'가 좋다며 애즈락 메인보드를 찬양하고 추천해주는 일이 많지만 나는 애즈락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필요 이상으로 싸게 만들다 보니 부품들의 질이 나쁜 경우가 많고, 호환성이나 말도 안되는 버그를 몇 차례 겪고 나면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의심부터 들기 때문이다. 인텔 정품쿨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거나 MS의 마우스가 정상작동 하지 않는 물건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들 권하는지 가끔 묻고 싶다. 내 마음속에서의 애즈락은 입으로만 조립 해본 사람들이 고르는 물건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

 

그런데 애즈락 랙이라는 브랜드를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애즈락 랙은 서버나 워크스테이션용 제품을 만드는 하위 브랜드로서, 모회사인 애즈락과 달리 평균적이고 무난한 제품들을 계속 내놓아서 이만하면 괜찮다 싶은 제품이 많다. '실험적이긴 하지만 쓸모는 없던 애즈락의 연구소 정신' 보다는 '필요한 곳이 꼭 있을 법 하지만 많이 팔리지는 않을 물건'을 만든다는 장점 또한 가지고 있다.

 

몇년 전, 인텔이 i7과 함께 1366 소켓을 내놓을 때 나는 개인 소비자용 CPU는 이제 발전이 완전히 끝장난 셈이나 매한가지니 PC 매니아들이 재미나던 시절도 다 갔구나 라고 생각했다. 개인 소비자용 CPU와 기업용 CPU의 소켓을 따로 두고 기업용 CPU만 발전시키겠다는 인텔의 뜻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예상은 현실이 되어 샌디브릿지 이후로 인텔의 CPU들은 내장 그래픽이 더 빨라지거나 전기를 덜 먹는 정도의 발전만 보여주고 성능은 영 나아지질 않고 있다.

 

△ 애즈락 랙의 EPC612D4I

LGA 1366 소켓도 충분히 컸지만 그 후속 규격으로 등장한 LGA 2011 소켓은 CPU 자체가 워낙 큰데다가 쿼드채널 메모리 컨트롤러를 쓰다보니 한 번에 메모리를 4개씩 써야 해서 ITX용 메인보드를 만들기 어려웠다. CPU 소켓만 해도 이미 ITX 규격의 17x17cm를 다 덮어버릴 정도이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소켓이 한참 작은 LGA 1150용 ITX 메인보드 중에서도 램슬롯 4개를 가진 물건이 없는데 소켓이 더 큰 LGA 2011은 더더욱 나오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LGA 2011 소켓 메인보드를 실물로 만져보며 노트북용 램이라도 쓰지 않으면 ITX로 나올 일은 없겠네 하고 중얼거렸는데 그게 애즈락 랙에서 실물로 튀어나왔다.

 

17x17cm 안에 노트북용 SO-DIMM 소켓을 집어넣고 2011v3 소켓의 넙데데한 면적은 Narrow Type 소켓을 써서 해결했다. Narrow Type 특성상 쿨러 종류는 몇 가지 되지 않지만 Dynatron 같은 서버 쿨러 전문 제조사에서 쿨러를 제작하고 있으니 사용상에 문제는 없는 셈. 결론적으로 이 물건을 쓰면 벽돌 두장 정도의 크기 안에서 18코어와 64GB 메모리를 쓸 수 있다. 그리고 PCI-E 슬롯이 살아있기 때문에 여차하면 사무용 PC 사이즈인 LP사이즈 안에서 GTX 타이탄 같은 고성능 VGA를 꽂아서 쓸 수도 있을테고.

 

△ 라데온 나노를 퓨리 나노로 착각하고 글자를 잘못 썼다.

라데온 나노와 EPC612D4I가 머릿속에서 휘리릭 뿅 퓨전을 하며 위와 같은 결과물이 나왔다. 부품들 크기는 대충 실제 비례에 맞게 했으니(1cm = 10px로 계산, 이를테면 ITX 메인보드는 1700x1700으로 그렸다)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단쪽에서 차가운 공기를 흡입하여 시스템 전체를 훑고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와류(Vortex)는 최소화 해서 공기가 한 곳에 갇혀 있지 않도록 부품을 배치했다. 섀시 전체의 가로폭은 대충 150mm 정도면 선정리 공간도 넉넉하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폭을 200mm까지 늘리고 메인보드 뒷면에 3.5인치 HDD를 달아주도록 만들 수도 있을테고.

 

사실 저런 구조의 케이스는 이미 실버스톤에서 FT나 Raven 시리즈로 나와있지만 작은 케이스를 잘 만드는 실버스톤이 가장 크게 히트쳤던 FT-02나 RV-02를 작게 줄인 물건을 만들지 않는 통에 결국 내가 손으로 그리게 되었다.

 

 

△ 실버스톤 FT-02와의 크기비교

FT-02가 ATX 메인보드를 넣는 물건 치고는 지나치게 커서 좀 부담스러웠는데 그 구조를 고스란히 갖다 쓰면서 ITX 메인보드를 활용하면 대충 빨간 선 정도의 크기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저만큼 작은 사이즈에 18코어와 64GB 램, 플래그쉽 수준의 VGA라고 하면 멋지지 않겠나.

 

저렇게 만들면 의외로 전기도 정말 적게 먹는다. CPU 150W, VGA 200W에 메인보드랑 HDD 같은거 다 합쳐봤자 50W도 먹지 않을 것이다. 결국 순간 최대 전력 기준으로도 500W 정도면 아주 넉넉할테고 실버스톤에서 450W/600W짜리 SFX 파워 서플라이가 이미 나와있으니 그런걸 사다 박으면 조용하고 여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거란 이야기. 대류현상과 양압(Positive Pressure)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덕에 케이스의 120mm 팬을 800RPM 정도로만 돌려도 온도는 충분히 낮게 나올 것이다. 케이스의 크기와 냉각 성능은 아무 관계가 없다. 오로지 냉각팬의 배치와 흡배기용 구멍의 위치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다.

 

△ 선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부품을 채워넣으면 선정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 가다가 부품을  저렇게 옹기종기 모아놓으면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걱정 안해도 된다. 위의 사진은 내 컴퓨터인데, 저렇게 빡빡하게 부품을 박아놓고 한여름에도 CPU 온도는 70도를 넘기지 않는다. 평소에 별 할 일이 없을때는 40도 정도를 유지하고 게임을 미친듯이 돌리거나 인코딩을 돌릴때 정도에나 60도를 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 컴퓨터의 본체 표면은 언제나 차갑다. 내부에 열이 쌓여있지 않다는 증거다.

 

그리고 컴퓨터를 조립할 때 선정리를 잘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이야긴데, 작은 케이스를 사서 선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부품을 채워넣으면 된다.

 

쓸모도 없는 상상을 가지고 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기분이 맹해졌다. 세탁기나 돌리러 가야겠다.

  1. 일본의 Scythe에서 발매된 Gentle Typhoon 팬인데, 본래는 JAPAN SERVO에서 개발한 고성능 2볼 베어링 팬이다. 애시당초 태생이 산업용 팬이었기 때문에 PC용 저가형 팬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물건. 지금은 JAPAN SERVO가 NIDEC에 인수되어서 NIDEC SERVO 브랜드로 나온다. [본문으로]
2 Comments
  • ddd 2018.10.07 11:44 디시 컴본갤에서 2017/18년 제일 희롱 많이 당하는 브랜드가 애즈락인데 2015년에 벌써 예견을 하셨네요.
    성지 순례 잘 했습니다
  • Favicon of https://swev.net SWEV 2018.10.09 04:42 신고 10년쯤 전 애즈락이 아수스의 자회사로 출범할 때만 해도 그냥 좀 웃기는 회사 정도의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인텔과 AMD CPU를 모두 쓸 수 있는 마더보드라든가...온갖 괴상한 물건들을 만들곤 해서 내돈주고 사긴 싫지만 한 번쯤 구경은 해보고 싶었고 저때만 해도 연구소라는 별명이 있었죠 애즈락은?

    시간이 좀 지나니 가성비 브랜드로 인식되면서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더군요. 싸지만 쓸만한 물건을 만드는 회사로요. 개인적인 생각을 여과없이 쓰자면, 카탈로그 스펙에 연연한 나머지 기본적인 설계 원칙이 잘 안지켜질 때가 많은 브랜드 정도의 느낌입니다. 작년 라이젠 X370 보드의 내장 LAN 사망 사건도 그렇고..이쯤 되면 소비자한테 피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7~8년쯤 전에도 저는 애즈락을 굉장히 싫어했는데 글은 오히려 늦었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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