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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페리아에 보이는 소니의 전략 본문
엑스페리아를 보고 있으면, 소니가 만든 넥서스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AOSP 순정 코드에 가까운 기본 탑재 운영체제가 특히 그렇다. 군더더기 없는 AOSP 베이스에 자신들의 장기인 미디어 기능을 잔뜩 넣은 뒤, 최소한의 편의 기능들을 끌어다 박았다. 너절하지 않은 소프트웨어 덕분에 본질에 충실해지긴 했지만 국내산 스마트폰들의 각종 편의기능에 익숙한 사람들의 속편하게 사다 쓸 물건은 아니라는 것이 엑스페리아의 한계다.
이런 엑스페리아를 보면서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소니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시장에서 1등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확신. 삼성 전자의 압도적인 내부 자원(OLED/엑시노스)과 대항할만한 자본도 기술력도 없는데다 광고 하나도 삼성만큼 해낼 힘이 없는 회사다. 그 와중에 중국 업체들은 자체 AP까지 생산해가며 소니의 목을 졸라온다. 결론적으로, 소니는 하드웨어적으로 다른 회사들을 압도할만한 특별한 기술력이 없다. 삼성의 OLED나 엑시노스처럼 다른 회사가 5년 안에 따라잡을 가능성이 절대 없다고 할만한 물건이 소니에 뭐가 있겠는가. 적어도 스마트폰 분야에서는 자신들이 하드웨어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없음을 소니의 경영진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답은 바로 매니아층 공략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매니아들만을 만족시켰기에 삼성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소니가 또다시 소수의 매니아들을 위한 제품으로 살 길을 찾는 일은 얼핏 보기엔 말이 되지 않는다. 허나 반대로 생각하면, 어차피 대중성 따위 이제와서 노려봐야 쓸모도 없으니 철저하게 자신들에게 충성도 높은 고객들만 챙기는 쪽이 오히려 쉬운 노릇이리란 생각도 해볼 수 있다. 거기에 소니는 오랜 시간 쌓아온 노하우가 결집된 브랜드를 3개나 가지고 있다. 그것도 스마트폰과 시너지를 일으키기에 아주 좋은 아이템들이다. 이어폰/헤드폰 라인업과 워크맨, 그리고 플레이스테이션이 그렇다.
△ 클릭하면 아주 매우 많이 커진다
소니는 음향기기 라인업을 싹 갈아엎고 광고에 제로 돈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 시원찮았던 AS도 예전보다 훨씬 소비자들이 받아들일만 하게 바꾸었다. 그리고 소니의 음향기기 사업부는 다시 생기를 띄기 시작했다. 소니는 이어폰/헤드폰의 제조 기반도 훌륭하게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어떤 소리를 좋아할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 MDR-E888의 소리를 그 누가 욕할 수 있을까. 음향기기는 감성의 영역이란 양념이 아주 많이 버무려진 공학이기에 어지간한 노하우로는 인기를 끌만한 소리를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다. 당장 어떤 소리가 사람들에게 좋게 들릴지 판단하는 것 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니는 저 부분에서 만큼은 수십년간 실패한 적이 없다. 저건 정말 대단한 노하우다.
스마트폰을 포함한 이런저런 기기에 많이 묻혀버려 워크맨의 브랜드 파워가 예전 같지는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CD와 카세트 테이프를 듣던 나같은 세대들에겐 무시할만한 브랜드가 아니기도 한데다 음장과 관련된 이런저런 기술들은 소프트웨어적으로도 어렵지 않게 재현이 가능하기에 엑스페리아 스마트폰엔 워크맨 앱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엑스페리아 Z3 시리즈엔 플레이스테이션 리모트 플레이 기능이 들어있다. 집안에 플레이스테이션이 있다면, 굳이 TV 앞에 앉을 필요 없이 플스로 게임을 돌리고, 엑스페리아 스마트폰/태블릿을 화면삼아 게이밍이 가능하단 이야기다. 익숙한 컨트롤러를 이용해서 게임을 즐길 수 있는데다 조용하게 혼자서 놀 수도 있기에 이 기능을 원했던 사람들이 더러 있다. 엑스페리아를 플스 전용 패드인 듀얼쇼크에 고정해주는 어댑터가 발매 되었는데, 없어서 못팔 지경이란다.
거기에 하드웨어를 밑바닥 부터 직접 설계할 능력은 없지만 완성된 기기의 '질감'을 훌륭하게 만드는 방법을 소니는 알고 있다.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손에 잡히는 느낌이 나쁘다면 쓰면서 마음이 편할리가 없다는 것을 소니는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제조사다. 카세트 플레이어, CD 플레이어, MD 플레이어 모두 정교한 회로 제작과 기구 설계 능력을 필요로 한다. 스마트폰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부분은 많지 않기에 기구 설계 노하우는 큰 의미가 없지만, 회로의 소형화/저전력화와 관련된 노하우를 여러가지로 쌓아놓았다는 점도 소니에게 참 다행스러운 일이 되었다. 과거에 이런저런 소형 음향기기를 만들면서 생겨난 이런 저런 시행착오들이 지금의 소니에겐 큰 자산이다.
이런식으로 철저히 매니아를 공략하는 것 만으로 회사가 지탱될리가 없지만 소니는 엘지/삼성전자에게 탈탈 털리는 10년 동안 이런저런 방향으로 사업을 확장해 두었다. 부동산과 보험 사업은 소니의 기둥이며, 수많은 거장 뮤지션들의 판권을 쥐고 있는 소니 뮤직은 전세계의 4대 음반 레이블이라 할만큼 거대한 업체다. 소니 픽쳐스의 영화 사업도 그럭저럭 재미를 보고 있다.
결론적으로, 돈을 벌어올 주머니는 따로 차고 있으니 엑스페리아를 통해 소니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사양산업이 되었지만 노트북 시장에서 나름대로 입지가 있었던데다 혁신도 여러번 보여주었던 바이오 브랜드를 내팽개친 마당에 갈수록 일반 소비자들과는 멀어지는 스스로의 모습에 불만도 가졌으리라. 그 와중에 자신들이 가진 장점과 능력을 쏟아부을 수 있으면서 소비자들에게 인기까지 좋은 스마트폰이란 기기가 소니의 입장에선 얼마나 반가웠을까. 소니가 엑스페리아에 이런저런 노하우를 쏟아붓는 것도 당연하다.
△ 이 한장의 이미지에 소니가 엑스페리아를 통해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이 다 담겨있다.
어려운 시장 상황이지만 살아날 길이 없을리는 없다. 지금처럼 매니아들을 잘 끌고 가면서 어떻게든 점유율을 유지하고 버텨낸다면, 언젠간 빛이 오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색을 잃지 않길. 언제나 새롭길.